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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얼음 2013. 10. 19. 06:44


몇 주 전에 엄마가 사 준 푸른 코트를 입고 거울을 보니 검은 단발 머리가 낯이 설었다. 날이 추워지니 슬슬 정신이 든다. 지난 몇 년 간은 긴 여행을 조금도 하지 못했고, 그 전에는 주로 여름철에 낯선 데로 여행을 떠났다. 덥고 습한 날씨에선 쉽게 피로해지고 불행해진다. 내년에는 애를 써서라도 여름을 피할 수 있는 형편을 만들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감기 기운이 돌자마자 감기약을 먹고, 프로폴리스 정제도 먹고, 아로마 램프를 켜고, 아로마 오일을 문지르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난방을 시작하고, 극세사 이불을 덮고, 방에 수건을 널어두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밖에는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고, 대림미술관의 슈타이들 전에 다녀왔다. 마지막 날이라 사람이 많고 마음이 급했으며 작품 앞을 지나치며 모든 전시물들을 다 찍어둘 기세로 각종 디바이스를 꺼내 사진을 찍는 인파들이 피곤했지만, 슈타이들이 에드 루쉐와 함께 만든 아름다운 케루악의 <온 더 로드> 를 전시한 방에서는 나도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다야니타 싱의 사진으로 만든 아트 포스터를 세 장 샀다. 한 장은 침대 머리맡에 걸었다. "Thunder is good, Dayanita. Thunder keeps you alive." 라는 슈타이들의 말이 인용되어 있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맥락과 무관하게도 마음에 드는 말이다. 방문한 김에 대림미술관 회원으로 가입했다. 


지난 주에는 E사의 학술 관련 소식과 웹페이지 업데이트 몇 건을 번역했고, H센터에서 들어온 번역 검수를 마쳤다.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몇 가지 쌓여서, 일상적인 이야기들과 일 이야기를 주로 쓰던 페이스북 계정을 닫았다. 안부는 곧이곧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밖에는 새로운 과외를 시작한 지 두 주째였다. 조금 고단한 자리를 예상했지만 (학부모의 기대가 컸다) 보수가 괜찮아서 아무려면 어떠냐며 시작한 일인데, 지난 주에는 의외로 학생이 나를 고단하게 했다. 문제의 수업일에는 시래기처럼 지쳐 귀가했지만 다음 수업에는 학생의 정서도 조금 나아져서, 다시 "오늘 수업 좋았어요" 하고 일어나더라.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과 엮기 싫은 일들을 어느 정도 해야 하고 나에게 그런 일이 영어수업이다. 할 능력도 있고, 영 못할 일도 아니지만, 자아를 바꿔 끼고 출근해야 하는 이중생활이기도 하다. 기왕 하는 싫은 일이면 매끈하게 해내는 것이 낫다. 


금요일에는 한 번 가 보고 싶었던 <그람모 키친>에서 편집자와 저녁을 먹었다. 라구 파스타와 원 플레이트 (루꼴라, 프로슈토, 유정란, 호밀빵과 파테)를 먹고, 나중에 호밀빵에 바질 페스토가 조금 나왔는데, 모두 무척 만족스럽고 따뜻한 식사였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식당이지만 집 근처라 지나치며 테이블이 비었나 슥 확인해보고 들어가도 될 것 같다. 

편집자가 전해준 새 소식이 내가 독자로서나 번역자로서나 손꼽아 기다릴 만한 일이어서, 손을 붙들고 "저 그거 시켜 주세요!" 했더니 편집자가 "제가 회사를 옮기면 별도 같이 가는 거예요!" 했다. 든든하고 기뻤다. 


일정을 약간 미뤄 월요일까지, 였던 마감은 알고 보니 조금 더 시간을 가져도 되는 듯 싶었고, 주말에 원고를 정리해볼 생각, 그밖에는 출판사의 새로운 계획과 관련해 나도 이런저런 제안을 해볼까 생각 중이다.  


저녁에는 잠깐 졸다가 y와 h언니의 술자리에 불려나갔다. (족발 세트를 시켰는데 양이 너무 많다고) 집 근처 '샤'로 옮겨 2차를 하고, 먼저 집에 돌아와 다시 졸았다. y가 귀가할 때 깨어나 잠깐 함께 놀다가 잠들었는데, 모 아이돌 그룹의 데뷔 무대에서 한 멤버가 무리한 안무로 인해 생방송 중 부상을 입고 뇌사상태에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영문 모를 꿈을 꾸었다. 119 구급대가 달려와 구급함을 여는데 안에 계란말이와 도토리묵이 들어 있어서, 응급환자 중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하고 꿈 속에서 생각했다. 화들짝 깨어나 아이패드를 꺼내 유튜브에서 사고 동영상을 검색해 y에게 보여 줘야겠다며 y를 깨우고서야 꿈인 줄 알았다. y는 코를 골며 자고 있다. y가 잠든 동안 오랜만에 y의 SNS를 구경했는데 슬픈 얘기 뿐이라서 내가 무엇을 잘 못해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를 무척 사랑하는 내 고양이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 그 조그만 머리 속에 무엇이 지나가는지 궁금할 때가 많은데 y에 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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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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