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느낀다(고 말하면 연인은 너는 실제로 가난하다고 한다), 일 주일에 수업은 하루, 과외가 없는 날은 이틀이다. 이틀은 수업 준비로 정신이 없고, 다른 날들은 과외만 하고 와도 한세월이다. 돈을 못 내서 핸드폰이 끊겼고, 덩달아 테더링으로 쓰고 있던 인터넷도 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왠지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지만, 연인은 무엇을 쓰면 돈을 내는 게 당연하다고 한다. 그러나 논리 바깥의 감정들. 은행 계좌에 돈이 있건 없건, 날씨를 착각해서 얇게 입고 나와 떨건, 빨래를 제때 하지 못해 스타킹이나 양말 없이 나왔건, 하필 바쁘고 바빠서 끼니를 못 챙겼건, 아침에 펀드를 들었던 금융기관에서 피싱 방지 문자가 왔는데, 일 년 전의 입금확인 문자가 함께 뜨더라. 내가 십만 원을 입금했던 모양이다. 그 후로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십만 원이라면 당장 이번 주에 어떻게든 해야 하는 일 몇 가지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잡동사니 상자들을 뒤져 카드와 통장을 챙겨나왔는데, ATM기 앞에서야 알았다. 일 년 간 내가 넣고 잊어버린 펀드는 원금이 손실되었고, 그래서 나는 만 원 한 장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이 나를 가난하게 느끼게 한다. 겨울이 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빈약한 문틀과 창틀 사이로 칼바람이 들고, 문풍지며 방풍비닐을 잘라붙여도, 세탁기가 얼고, 옥상이 얼음으로 미끈거리고, 온수를 쓰는 데 힘이 들 것이다.
어제는 과외 사이에 당산역 쪽 한강공원에 서 있었다. 바람이 찼고 멍청하고 재미있고 더러운 기계로 라면을 끓여먹었다. 우리 오헨리 소설에 나오는 커플 같아. 연인이 그날 밤 감기를 앓게 된 것까지 포함해, 이건 그 은행원이 쓴 소설을 닮았다. 적당히 어리석고 적당히 선의를 가진 필부필부들, 마침내 그런 것이라고 느끼게 됐다. 수업 도중에 가방을 뒤지다 더러운 동전이나 웃기는 산타클로스 모양의 usb 메모리 사이에서 연인이 아침에 넣어 준 청포도사탕 두 알을 발견할 때의 감각.
연애를 하고 나는 덜 멋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 그런 것이 내내 되고 싶었던 것 같아.
매일 중학생용 수학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오늘은 제곱근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가능한 시간마다 프랑스어 딕떼를 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세계를 덜 불안하게 걸어다니는 데 도움을 준다. 계속 열고 닫는 경첩은 당장에 쓸 일이 없더라도 아주 녹슬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또한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어째서 여러 번 설명했는데도 기초영문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는, 몇몇 과외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해준다. 학생들의 과외수업을, 일 주일에 한 번 듣는 대학원 수업을, 성실하게 준비한다. 나는 요즘 스터디플래너도 쓴다. 공부해야 할 것들과 처리해야 할 잡무를 항목별로 쓰고 매일 지워가는 것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생들에게 영문법을 가르친다. 이제 쓰라는 것을 쓰고, 읽으라는 것을 읽어갈 시간밖에 없어서, 그만큼을 열심히 한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보충수업을 해줄 시간이 없어서, 가급적 빨리 성과를 낼 수 있게 가르치려고 생각도 많이 한다.
달력에 X표로 날짜를 지워가는 싫은 습관이 생겼다.
버텨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나날들이 길다.
다행히 옆에 좋은 연인이 있다.
영어회화 튜터링을 예약해 놓고서 매일 통장잔고를 확인했다. 지불할 수업료가 부족하다면, 수업을 취소할 다른 핑계를 생각해 내느라 머리가 터졌을 것이다. 비교문학을 전공하는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S와 일 주일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다. 내겐 영어로 말해야 할 일이 아주 많고, 하고 싶은 말도 아주 많아.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하고 싶어. S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숙제를 내달라고 한 학생은 내가 처음이라며 웃었다.
pas mal, pas mal.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극복해야 할 것도 많고 더 잘하고 싶은 것도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었던 며칠 동안에 고양이를 더 많이 안아주고, 이성복의 시집 몇 권을 다시 읽고, <맹신자들>도 읽고, 수학 문제도 많이 풀고, 섹스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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