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shit

진흙 얼음 2010. 12. 31. 02:09

 송년 고민은 종이에 적어 흘려보낸다. 이게 신년 고민이 되면 슬플 거다. 신년엔 죽음보다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싶으니까. 망이가 죽은 후 원인불명으로 나날이 수척해지던 아기고양이 머큐리를 입원시켰다. 입원의 사흘째 밤이 지나가고 병원비는 할증 붙은 택시미터기처럼 치솟는 중이다. 복수가 차고, 기타 등등. 추가적인 검사와 진료를 더 할지 하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은 이틀이 남아 있다. 고양이는 왜 보험이 안 되는지 궁금하지만 보험이 된들 우리는 무직자라 소용없다. 머큐리를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다. 그애가 살아나면 머큐리는 폴의 고양이가 될 것이다. 폴은 입원한 머큐리를 보며 한참 울다가 왔단다. 의식은 있어? 응, 털을 깎았더라. 폴은 그애가 병원에서 어떤 진단을 받았는지, 의사 소견은 무엇인지 한참 내게 알려주었다. 단지 그것이 내 의무이기 때문에 들었다, 관심은 없었다. 다 아는 이야기다. 목과 다리 털을 깎았을 것이다, 가장 굵은 혈관이 지나가니까. 수액을 맞히면 잔등이 혹처럼 부풀어 오를 것이다, 혈관을 못 찾아서 피하주사를 놓았을 테니까. 진료대 위에서 그애는 울었을 것이다, 아프니까. 그리고 원인은 모를 것이다. 여태 그랬으니까. 아무에게도 그애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까 머큐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모두가 다, 내가 잘 아는 이야기다. 이제 와서 중요한 일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는 가난하고 지금 하필 더 가난하다, 둘 다 한동안 무직자 생활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멍청해진다. 돈이 생기면 식료품을 사는 대신 아이섀도 팔레트를 산다. 우리가 돈을 어디에 썼건 어쨌건, 며칠 전 둘의 카드 한도는 오버, 내가 아는 한 오늘내일 중으로 두 사람 통장을 탈탈 털어도 지금까지의 병원비를 지불 못한다. 그게 큰돈이어서가 아니다, 보잘것없는 돈이다, 다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돈이다. 필요하다면 어디서건 융통할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우리 고양이가 죽어가니까, 그건 충분한 사유가 된다. 그런데 머큐리는 올해 아홉 번째로 죽어가는 고양이다. 그 중 일곱 마리가 실제로 죽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른다. 이유를 모르니까, 건조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좋다, 치료를 계속할 것인가? 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머큐리는 죽을 것이다. 치료를 계속하더라도, 통계적으로, 머큐리는 죽을 것이다. 살아난다면 기쁜 일이며 살아나길 바란다, 그런데 나는 이제 고양이가 살아날 가능성에 대해 아무 말이나 기대도 하고 싶지 않다. 이제 이건 슬픔의 영역에서 벗어난 일이다. 이런 마음을 보통은 깊은 빡침이라 부른다. 치료를 계속할 만한 병원비가 없는 것은 사실이고, 어디서건 병원비를 융통할 만한 구석이 생겨날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 심하다, 그리고 너무 지겹다. 내일, 아니면 모레, 폴은 나에게 의사의 새로운 소견과 치솟은 병원비를 알려 줄 거다. 정상체중 이하의 머큐리가 가볍게 타고 있는 줄이 삶에서 가까운지, 죽음에서 가까운지도 그때 전해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에 관해 두려워하는 부분은 그게 분명 내 신경을 찢어놓으리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여름에 나는 과외비와 조교비를 동물병원에 쏟아부었다. 한도를 초과한 카드명세서에는 동물병원의 이름들이 찍혀나왔다. CMA 통장, 막 붓기 시작한 적금, 내 통장만 털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통장까지 허물어져 나갔다. 어쨌든 나는 스스럼없이 돈을 빌리고 남의 카드를 긁었다.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건 제정신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게 단 한 번으로 끝날 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 모든 것의 대가로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차라리 작고 예쁜 영구차를 한 대 사는 게 나을 뻔했다. 너무 불행해서 내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이 일에 다행한 부분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건 삶에서 최악의 일련의 경험들이 될 거다. 그보다 더 불행할 리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삶이 아닐 거다. 그 때 나는 너무 분주해서 삶에서 이탈할 수가 없었고, 앞으로 다시는 고양이건 인간이건 책임질 것을 만들 계획이 없다. 일생의 불행을 다 겪었으니 앞으로는 적당히 즐길 수 있는 불행을 찾아다니며 살 것이다, 그게 신년 계획이다. 

 머큐리가 생환해 우리 집으로 퇴원하지 않는다면 사흘 전 모습이 마지막이 될 거다. 난 머큐리를 보러 갈 생각이 없다. 앓는 고양이의 병문안을 가는 건 옳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지만 난 그 옳고 마땅한 일을 남들의 몫까지 다 했다. 고양이의 목숨 앞에서 더 이상 경건해지라니 난 작은 것들의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고 자백하자면 보통보다 못한 인간이다. 여름에는 이게 내 일생이 아니기만을 바랐으나 그건 이 모든 것의 견딜 수 없음과는 별개였다. 다만 이괴롭힘의 주체가 나이며 고통받는 대상이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기뻤을까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된 혈을 누르거나 팔다리에 연결된 줄을 움직이는 것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그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누구를 그렇게 괴롭힐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을까, 행복한 한철이 되었을 것이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 아니라 한 계절이 가도록 누구의 머리채를 붙잡고 지옥에 밀어넣고 그 자가 지옥에서 나오지 못해 천천히 죽어가는 걸 보는 거다. 지옥에서 그 자가 사랑하는 것들과 유일하게 의탁하는 것들이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 . 그 백치 배우는 음향과 분노만을 내뱉는다. 모든 동선에 장애물이 놓여 있다. 그리고 배우의 어떤 고통도 충분히 전시되지 않는다, 그건 배우에게 미약하게나마 기쁨을 주니까. 선심을 써서 내가 구해주는 척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천재 연출가가 될 뻔도 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일들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났다. 나는 고양이들과 서로를 귀여워하며 더불어 살고 싶었지 고양이의 입에 호스를 처넣고 심폐소생술을 한 다음 소생에 실패한 고양이의 목숨값을 할부로 지불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 

 혹은 다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고양이가 죽어서 너무 슬퍼,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애의 좋았던 모습들이 자꾸 생각나. 나는 그애를 너무 사랑했어. 
 그러나 그건 한 마리의 고양이가 죽었을 때 하는 말이다. 혹은 두 마리. 세 마리까지는 괜찮다. 고양이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데 자기 삶의 심각한 하자를 자책하지 않을 수는 없고, 딱히 하자가 없다면 자기 인생을 이에 걸맞게 끌어내려서라도 탓할 무엇 하나는 만들어 두어야 한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물루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애가 가장 건강하고 행복할 때도 그애가 죽는 꿈을 꾸었다. 죽은 그애의 피와 털가죽을 간직하는 꿈이었다. 하필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남들이 자신의 부족을 다른 무엇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누가 날 효과적으로 죽이고 싶다면 고양이들에게 이런 일을 저지르면 되는 거였다. 

 뼈저리게 가난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가난해서 가질 수 없는 것보다는 얼굴에서 가난이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두려워한다. 가난한 계절이 끝나지 않으면 그것이 마침내 지나가더라도 말씨와 태도와 품성이 이를 기억하고 증언하지 않겠느냐고, 언제까지나. 마찬가지다. 가끔 거울을 보면 나는 여전히 애도하고 있다. 애도가 습관이 되는 것이다. 머큐리를 만나러 간다면 난 순식간에 (입력된 대로) 미망인처럼 굴 것이고 그 표정을 써먹을 날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여름의 어느 날에 물었다. 혹시 내가 어제 미쳐서 고양이들을 다 죽였어? 그녀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모든 일이 너에게 가혹하다고 말해주었다.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나 자신만 아니라면. 그러나 나는 바늘 끝만큼도 다치지 않기 위해 바늘로 된 지옥 위에 다른 누구를 밀어 넘어뜨릴 수도 있는 사람인데, 차라리 내가 어제 미쳐서 고양이들을 다 죽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옥문을 내가 열고,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 닫고 걸어나온다면 그건 또 얼마나 기쁘겠는가. 

 만약에 그애가 죽는다면 그애는 고통스러워 할 거다. 온 몸이 젖어 있게 될 거다. 턱뼈나 엉덩이뼈가 부서질 것 같은 기구들을 몸 안에 쑤셔넣을 거다, 그게 그애를 조금 더 살리는 방법이라고 믿어지니까. 입을 벌리면 입 안이 빨갈 거다. 고통스러워서 턱을 바닥에 짓찧다가 어느 순간 사망할 것이다. 물론 난 그애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죽는다면 고통이 가벼웠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할 순 없다. 인정하자, 난 죽음에 대한 얘기를 좋아하게 됐다. 죽음의 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를 좋아하게 됐다. 좋아하게 됐다긴 뭣하고 그런 것과 친하게 됐다. 한 계절 내내 그런 짓을 했더니 이제 고양이를 보면 무서워 죽겠는데 헤어질 방법이 없는 데다 너무 귀여우니 어쩔 수가 없다. 난 그애들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진 솔직히 모른다. 그래도 그게 다 끝난 건 아니다, 사후강직과 부패라는 과정이 남으니까. 살아있을 때 그애들은 참 좋은 동물이다. 난 그애들을 안 죽게 하고 싶어서 별짓을 다했지만 죽어야 되겠어서 죽는다면 이젠 내 눈 앞이 아닌 데서 죽었으면 좋겠다. 이젠 좀 억울하다. 하기 싫은 일은 좀 안하면서 살면 안되나 근데 이건 무슨 대의명분도 없고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짓이냐고 난 정말 괴롭힘 당하기 싫고 남을 괴롭히고 싶다고 따라서 남을 괴롭히겠다는 신념의 일환으로 이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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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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