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행복

진흙 얼음 2011. 1. 6. 06:07

 드라마 치료에 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ex는, 첫 해는 이론이고 다음 해는 실습이니 내년쯤 너를 치유할 수 있겠다고 말해왔다. "내년까지만 참으면 치유될 수 있을 거야"
 그거 진짜 좋은 일이네, 내년에 좋은 사람 될 테니 올해는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아니, 너를 치유하면서 내가 병들고 아마 너의 드라마치료에 실패해서 내 공부는 수포로 들어가겠지. 일지에는 '오늘도 차도가 없었다' 라고 쓰고...  

 연초마다 앓아왔다, 어느 일월에는 링거를 꽂고 응급실에 누워있었고 어느 일월에는 방 안에 유폐되었다, 병명은 언제나 과로와 과다한 피로누적.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지나고 보면 로맨스다. 어느 일월엔 혼자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사흘이 지나자 방 안에 행크와 D.T.와 함께 있게 되었다. 행크는 찰스 부코우스키, D. T.는 딜런 토마스의 애칭이다. 창가에는 고양이 한 마리, 와인에 점점 더 그윽하게 절여져 가는 과일들. 바깥은 눈투성이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누구의 무릎에 앉던 나날은 지나고, 이제 누군가를 무릎에 앉히면서 여생을 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왜 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 있는 거지? 부르짖으면서도 열심히 눈을 휘면서 마치 들뢰즈가 내 첫사랑이었다는 것처럼. 내게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다는 것처럼. 

 오전 렉처를 듣고 디스커션 전에 도망쳤다. 이제 난 그걸 도망이라 부르지 않고 다만 내가 가야 하는 곳을 알고 걸어간다고 생각한다. 난 공식적으로 풀타임 스튜던트가 아니라 생업에 종사하러 나간다는 핑계를 댔다. 생업은 물론 사는 거. 나오는 길에 누군가가 "섬별씨 뭐야, 군기가 빠져갖고" 그랬다. 그 대사는 징그럽지만 이 모든 일의 징그러운 핵심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밑줄을 쳐 둘 만한 대사다. 
 여기 군대 아닌 줄 알고, 군기 안 갖고 왔어요.
 
 이번 주 내내 신체건강은 엉망이다. 매일이 그러하다.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다가 새벽에야 깨어나니 폴과 자홍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요사스럽게 창백하다"고 했다. (야식을 먹자 혈색이 돌아왔다) 왜, 아픈 날 거울을 보면 예쁘잖아. 얼굴은 희고, 눈은 흐리고. 지나온 삶에 대해 생각하면 아무래도 영화를 너무 많이 보고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율리시즈" 같은 것을 읽으며 어른이 된 사람들은 앞으로 무엇을 살게 되는 건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올해의 목표 중 사소한 것들 중 하나는 복학하고, 죽은 사람들을 경멸하느라 마음을 너무 낭비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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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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