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가방 안에다 첨삭받은 에세이를 넣어다니며 오늘이 이렇게 불길한 건 그 페이지들의 무거움 때문이라고 잠자코 생각했다, 해당 에세이를 쓰는 내내 난 그게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12/15. 이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들이 맴돌아도 눈물이 처 나서 쓸 수 없다. 그건 전부 사랑 때문이었다고 또 한번 적어내면 무엇이 달라질까 아니면 나는 그냥 조금 환잔가. 대학원에서 나는 모두 세 번의 크게 이상한 짓을 저질렀는데, 세 번째가 지난주였다. 그날 밤엔 회전초밥을 얻어먹는데도 슬픔과 굴욕감이 작은 배에 실려 빙글빙글 돌았다. 평생 이렇게 고독할 거라고 접시들이 제각기 쨍강거렸다. 세상에, 또 일주일이 지났고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억지로 써낸 에세이는 기술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너무나 허약해서 나는 자꾸만 생각해야 했다, 이런 종류의 고통은 느낀 적이 없다고. 고통의 깊이는 형편없어서 그건 거의 고통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양이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건 의사의 차트 같은 거였다. 네가 앓고 있는 것이 이렇게 구차하다고 나는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는 것이 너무 적어서 그런 글밖에 쓸 능력이 없던 시점 이후로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서투른 글을 쓴 적이 없었다.
에세이를 돌려받으면 자조적으로 그 안에 '실존', '고독', '초월'이 몇 번 반복되는지 세어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녹색 펜으로 단어마다 둥글에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선고했다: Rambling.
하루종일 이상한 일들만 벌어졌지만,
그리고 나는 죽은 내 작은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날들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며 썼던 긴 소설처럼 이사를 앞두고 일종의 의무감 때문에 자꾸 죽은 개들이 나오는 소설을 썼다.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우는 대신에 내가 정말 가졌던 것들에 대해 많은 거짓말들을 한다. 그리고 나는 대학시절의 소설이 대학원 첫날 새벽에 중단되어서 영원히 미결인 것처럼 이사가 끝나면 지금의 소설과도 작별해야 한다.
이제 나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것이다.
이 집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았고 이 집에 사는 동안 나쁜 추억이 너무나 많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고양이들이 죽은 여름에 모든 것이 끝났단 걸 알게 됐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그 때 너무 크게 나쁘게 잃어버린 것들 중 아무것도 복구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압도적인 상실감 때문에, 그리고 함께 무너진 생활 때문에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는데, 천천히 알게 되었다. 사람의 일생에는 한 번, 혹은 여러 번 그런 날들이 오고 그 후에도 삶은 계속되지만 어쩐지 영영 그 전의 자신과 이상한 단절감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는 원래 고독하고 게으르고 슬퍼했고 또 마음이 잡념으로 항상 소란했는데, 그러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덮어씌울 생각은 없다. 다만 이전의 생에서 혼자 자꾸 연습했던 것들이 단번에 벌어졌다: 사랑하는 고양이들이 눈앞에서 끔찍하게 연쇄 돌연사하는데 할 수 있는 것도 도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고양이들이 죽을 때까지 바닥에 머리를 찧는 것을 여러 번 보느라, 그리고 그 애들을 종이상자에 넣어 동물병원 냉동고에 집어넣는 일을 여러 번 하느라, 그냥 어서 다 죽고 나 혼자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일들이 일단락되고 나서 처음에는 생활도, 마음도 천천히 괜찮아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후로 친구들은 조금 더 내게 친절했고 그건 내가 달리 수를 써서라도 얻고 싶은 덕목이었다. 여름내 다른 일도, 생각도 거의 할 수 없어서 하고 있던 일들을 거의 모두 망쳤고, 조교일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지도교수와의 사이도 나빠졌고 공부에도 집중할 수 없어서 휴학을 했다. 모든 게 다 나쁜 건 당연했다. 생활을 도저히 혼자 꾸릴 수 없어져서 룸메이트를 만들었다. 내게는 회복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몇 가지 해결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나는 그것들이 애프터이펙트라고 생각했었다, 애프터라이프가 아니라.
일 년이 되어간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그 일과 함께 있는 것 같다. 내 삶은 고양이들이 죽은 뒤의 삶이 되었고 나는 고양이들이 없는 내가 되었다.
가끔 어떤 식으로라도 생을 진전시켜 보려고 애쓴 적은 있었지만 나는 그 후로 사는 일에 무관심한 상태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많이 웃고 새로운 일을 기웃거리지만 그건 이전 생에서 묻은 습관이다. 이상하다, 애도가 끝나질 않아서 이젠 뭘 애도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다.
첫 며칠을 제외하고 나는 죽은 고양이들의 이름도 떠올린 적 없었다. 애초에 나는 마음이 약하고 귀여운 것을 좋아할 뿐 동물의 생명을 차등없이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내 고양이 물루를 사랑할 뿐이었고 동종의 동물들에게 마음을 조금 내어줄 뿐이었다. 그 시절의 일기에는 죽은 불쌍하거나 가엾다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고 다만 내가 너무 괴롭다고 여긴 너무 끔찍하다고, 또 무섭다는 말들만 영원히, 너무 많이, 반복된다.
결국 나는 상실한 대상이 아니라 압도적인 상실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고양이가 아플 때 나는 온몸이 아팠고 고양이가 죽었을 때 나는 슬픔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슬픔, 그리고 슬픔의 당사자라는 절망감, 그 다음에는 외로움, 모두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날들 중 어느 하루는 욕실에서 미끄러져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었다, 그 정도로 피곤한 지칠 만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슬픔도, 아픔도 아니었다. '고양이가 아파서 출근할 수 없다'는 말은 '외출해 있는 동안 고양이가 죽으면 돌아와서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두렵다'는 뜻이었고, '고양이가 죽어서 너무 힘들다'는 말은 '그 무서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 괴롭다'는 뜻이었다. 그건 주로 생물이 사체가 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과 그 사체를 수습하는 과정에 연루된 말이다.
아직도 가끔 죽은 고양이들이 꿈에 나오는데 그럴 때 나는 그애들이 잘 지내거나 살아 돌아오기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과 그 냄새와 그 뒷처리 때문에 운다. 여름에 나는 사체처리반이었고 유가족이었기 때문에 잠깐 다른 삶을 모두 포기했다고 여겼는데, 그리고 그런 절망적인 마음으로 쭉 살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여기로 돌아온다. 내가 겪는 실패들은 이전 생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찮기에 이따금 그 실패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한데, 전혀 무관한 슬픔들, 즉 실연이나 지각, 병, 실직, 혹은 단순한 취기나 나쁜 꿈까지도, 아차하는 순간에 그 감각들을 불러온다. 나는 원래 하찮은 일에도 울고 조금의 불편도 견디질 못하고 내 삶이 망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래도 결국은 그것과 더불어 잘 살 수 있었는데, 어두운 방 안에서 차도도 없이 죽어가는 고양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울어도 소용 없고 잠을 못 자서 너무 피곤하고 울면 눈이 아파서 안 된다고, 모든 걸 민첩하고 무감하게 처리하겠다고 결심하던 기억이 자꾸만 튀어오른다.
그 여름에 마지막까지 너무 앓던 고양이들은 두 마리였다 오늘 밤 안에 죽을 게 분명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일단 상자에 넣어 멀리멀리 안고 갔다. 고양이 한 마리는 상자를 발로 차고 머리로 찧다가 잠잠해졌고 다시는 미동도 없었다. 너무 겁이 나서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여러 번이었는데도 나는 고양이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마다 눈물이 아니라 비명을 질렀다. 그건 짐승의 시체니까. 그리고 그 짐승의 시체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상자째로 땅에 묻었다.
다른 한 마리 고양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도, 이제 더 이상 그애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메밀밭에 두고 어서 돌아왔다. 그게 내 비밀이다. 나는 그애들을 버린 건지 죽인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정말 죽어서 고양이 지옥에 가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 비슷한 걸 살아서 보았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다. 주사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는 새끼고양이들 중 대부분은 병원에 데려갈 틈도 없거나 병원에서 돌려보낸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애들은 대개 내 방에서 죽었고 그 중 한 마리가 상자 속에서, 다른 한 마리가 메밀밭에서 죽었다.
그게 내 비밀이다. 작년에 모두 여덟 마리의 고양이가 죽었고 죽은 고양이의 수가 그 정도일 때는 평생 누가 죽는 장면을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귀여운 아기고양이들을 잃어서 슬퍼하는 철없는 소녀가 할 법한 일보다 조금 더 이상한 짓을 해야 한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겨울에 갑자기 죽은 망이와는 추억이 많았지만 내가 아침에 깨어나 동물의 사체를 발견하는 게 사망 후 몇 시간이 흐른 이후여야 한다면 당연히 여름보다는 겨울철이 견디기 나았다. 망이는 어른 고양이여서 조그만 종이상자엔 들어가지 않아서, 거대한 스티로폼 상자에 넣어 안고 가야 했다. 그래도 몸의 일부는 삐져나왔다, 사후강직이 일어난 고양이는 너무 길고 딱딱한데 세상엔 그런 사이즈의 용기가 별로 많지 않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오직 내가 사랑했고 너무나 귀여웠던 아기고양이들을 다 잃어버린 슬픔 때문에 이렇게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건 그 아기고양이들이 혀를 길게 빼물고 눈이 휙 돌아간 채로 죽고 또 내가 불행히도 잠들어서 서너 시간 후에 발견하게 되는 때는 딱딱하게 굳어 있거나 냄새가 났던 것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 개월 후 구제역과 살처분 뉴스가 연일 미디어를 떠돌던 때, 그리고 살처분 처리에 가담한 공무원들의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한 때가 되어서야 나는 이 끔찍한 감정의 정체에 좀 다른 것들이 포함되어 있단 걸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예전처럼 살 수가 없다.
불안한 일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토기가 올라오는 습관이 생겼고,
다행히 죽음 이후의 삶을 믿게 되기는 했지만
새 집에서는 이것들과 이별할까,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