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잘 지내려 하지만 그런 결심조차 의아한 것으로 만드는, 일들이 있다. 예컨대 이번 대선 결과가 그렇다. 나는 그 주요 야당 후보의 지지자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만약 정말 선택지가 둘뿐이라면, 이번 대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선과 악의 대결, 이편과 저편의 싸움, 유신세력과 반유신세력의 대결이라면, 대충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인지에 대해선... 이름을 바꾸고 등장한 여당, 역사적인 독재자의 피붙이, 말투도 생각도 어눌해 보는 것만으로도 창피해지는 어느 쪽 보다는,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퍼스트레이디를 대행했다는 이력을 내세우는 대신에 인권변호사로 일했던 사람, 어떤 슬픈 정치가의 최측근, 특전사 출신(아무튼 이런 면면이 인기가 있었다), 시골에 멋있는 집을 가지고 있지만 소탈하게 지내고 있고, 아내와 어린 아이들, 개와 고양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국정을 맡기고 싶어할 거라고 대강 믿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밝혀진 사실들에 준하면 그는 정의롭고 청렴한 사람이다. 아무리 내가 그를 지지할 수 없었다고 해도, 그는 다른 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높이에 있었다.
결과는 그렇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낯선 세계에 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준이 퍽 낮은 세계. 시적 정의와 무관한 세계가 우리에게 왔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를 통하여. 당선자의 얼굴은 쭉 기쁨으로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해에 논문을 쓸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대선이 있었던 주에 종합시험을 보았고, 결과를 아직 모른다. 그밖에는 꼭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한참을 앓았다. 새해에는 두 가지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다. 하나는 쭉 궁금했던 어느 세미나의 후속 모임이고, 어떤 글을 쓰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게는 낯선 사람들과 편안하게 있는 연습, 어느 순간부터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겼던 어떤 글들을 쓸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른 하나는 가을학기에 휴식했던 "화요 갈가마귀 대책위" 를 다시 시작하는 것. (part 2라는 이름도 붙였다.) 인원에 조금 변동이 있었다. 이 모임에 관해선 이상스런 책임감을 갖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대가로, 진행을 도맡아야 한다. 함께 쓰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일을 가장 낯설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표는, 책임질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에 대해 쓰는 것, 사람들에 대해 쓰기 위해 그 사람을 알기 위해 분투하는 것. 그런 것들을 하는 동안에 우리가 조금 더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용접불꽃은 아름답다. "그것뿐이다." 쓴 것에 책임을 지고 싶다. 내 삶은 여전히 고장을 숱하게 일으키고, 나는 어쨌거나 그걸 고쳐보려고 애를 썼다. 잘라내고, 용접하고, 이어붙인 데를 매끈하게 하려고 여러 밀도의 눈을 가진 사포를 끈질기게 문질렀다. 그러나 배관공의 근면한 직업수행 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모국어를 이상스럽게 사용해 무슨 일에 관해 쓰는 것이다. 불꽃이 아니라 흑연과 관계하는 직업이다. 이제 나는 손에 익은 도구들을 누구보다 잘 사용해야 한다. 다루기 어려운 연장들은 가능한 한 내려놓고, 필요하다면 누구 다른 이에게 선물하고, 피와 눈물, 잉크와 레몬을 으깨고 섞을 시간이다. "무슨 일에 관해서", "가능한 한 이상스럽게", "모국어로", "쓰겠다."
첫 모임을 위해 만든, 일정표 일부를 아래에 붙여넣는다.
5회차 모임을 위해서는 긴 과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두 명의 인물을 만들어
봅니다.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개인적 배경과 선호도를
가지고 있는지, 각자에게 한 페이지의 이력서를 만들어 줍시다. (이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 글자의 한국식 본명, 혹은 보다 호사스러운
이국적 이름, 동기가 분명한 이니셜, 현장에서 불리는 코드네임
등 어떤 방식이라도 무관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를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연인, 연락이 끊긴 동창, 모녀, 노사관계, 우연히
같은 칸에 탄 승객 등 어떤 관계든 가질 수 있습니다. 긴밀하거나 느슨한 관계를 가진 이 두 사람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장면을 만들어 봅시다. 이 장면은 앞으로 쓰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들과 첫 인사를 나누는 편안한 기분으로 한 페이지-두 페이지를 써 옵시다. 우리 각자가 만들어낸 이 두 사람은 앞으로의
모임에서 드문드문 등장하는, 우리와 가장 친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랜만에 재개하는 모임입니다. 안부와 식사를 나누면서, 그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고, 일어난 일들이 읽고 쓰기에 어떤 파장을 줄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9월부터
일어난 큰 사건들, 사소한 인상들, 본 것들, 읽은 것들, 쓴 것들, (학생이라면) 지난 학기에 배운 것, (직장인이라면) 4/4분기에 했던 주요한 업무 등에 관해 이야깃거리를 준비해 오길 바랍니다.
별도로, 모임 전까지 잘 짜인 단편 몇 편을 미리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과제가 있습니다.
읽고 오기:
김연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김숨, 「모일, 저녁」
미야베 미유키, 「선인장
꽃」
셜리 잭슨, 「복권(Lottery)」
유디트 헤르만, 「아쿠아
알타(Aqua Al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