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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감정의 자연발생적인 넘쳐흐름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이란 물론, 시에 관한 워즈워스의 정의. 종시를 엉망으로 보고 나서 그 기분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물론 워즈워스의 저 정의는 따로 떼어놓고 인용될 때 흔한 오해-시란 오직 정서에 근거하는 것이라는-를 낳곤 하지만 실은 워즈워스는 형식적 파격을 주창한 반면 시정신의 지성적 전통을 긍정했다.) 일 년째 공부를 '쉬고 있었고', 앞으로 그만둘 '계획이었다'. 그러니 시험은 애초 불필요했다, 운 좋게 붙으면 기쁜 거고, 아니더라도 문제나 보고 나오면 좋지, 생각했었다.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늘 노력을 덜했고, 그에 비해선 운이 좋았고, 불운한 일이 생기면 그것을 팔아 걱정을 샀으며, 드물게 마음을 쏟아부으면 '이겼다'.
그런데 막상 시험이 끝나고 나니 생각지 못했던 강렬한 감정이 넘쳐흐른다, 그리고 지배적인 비율로 그건 수치심이다.
나는 치사하게, 공부를 '쉬기 전', 무엇이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첫 세 학기들을 자꾸 떠올리며 안타까워진다. 설마 코스웍을 견디지 못하고 휴학하거나, 이후의 진학에 마음을 버리거나, 설마 종합시험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잠깐의 나날들. 어쨌거나 이번 학기 성적표에 그려진 성적을 받는 날이 절대로 올 가능성이 없었던 나날들. 그 때도 나는 고민이 많았고 생존은 힘겨웠고 다른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이따금 공부가 싫었다, 우는 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건 죄 연구실 책상에 엎드려서였다.
나는 석사 수료생이 됐다. 자꾸만 지연되었고, 이젠 남은 마음도 없어서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던 와중이었으니까, 이제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며칠째 울적하다. 다시 떠올릴 일이 없다 여겼던 C선생님의 호통을 귀로 다시 듣는 것 같다. "너는 잘난 게 아니라 똑똑한 것 뿐이니 잘난 척 하지 마." 그 때 이틀이나 침대에 엎드려 울었던 것은 오해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나는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는데, 잘난 척 한 적 없고 할 수도 없는데, 나는 나태하지만 그래도 그건 공부랑은 관계가 없는데. 그러나 이제 간신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됐다. 시가 좋았고, 마음을 쏟아부었고 운도 좋았던 데다 똑똑하기까지 해서 "이기고 있던" 나날들이었다. 지도교수는 "엑스트라오디너리" 하다고 칭찬했고, 기뻤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이 내가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이나 탁월한 능력을 증거한다고 오해했고 지금도 일부 그러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의 진상은 사실 다른 데 있다. 나는 전전긍긍하지 않으면서도 멋있고 싶었고, 그 허영을 충족하는 칭찬을 너무 일찍 들어 신이 났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걸 더 이상 잘 할 수가 없어지자 학교를 쉬었고, 마지막 학길 등록했지만 별로 잘 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끔찍한 잘난 척이라는 걸 내내 희미하게는 알고 있었다.
왜 휴학했는가, 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이젠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있다. 여름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고, 그걸 극복 못했기 때문에 공부가/ 시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렇게 된 이상 여태까진 안고 가던 문제들, 즉 돈도 시간도 부족하고 날이 갈수록 더 외롭게 느낀다는 사실을 더 이상 버틸 구실이 없어졌다. 양생을 위해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면 다시 좋아하게 되겠지. 그러나 나는 양생술에 실패했고, 이번엔 '아팠다', 아마 아프려고 아팠을 것이다. 입을 열면 잘나고 똑똑한 변명이 쏟아질 것 같아서, 친구들을 많이 괴롭혔지만 학교에선 도망다녔다. 돌아왔지만 복구한 건 없다.
이상하지, 미안한 일들이 많다.
누구에게라곤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변명을 너무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