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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어 계란 2015. 3. 3. 00:40

- 좋은 일 하나, 나쁜 일 하나가 있을 때 기뻐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잃은 건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대로 되진 않는다. 오늘 기다리던 합불합 판정은 둘이었는데, 열어 보니 합이 하나 불합이 하나다. 불합은 시험 결과에 따른 최종 불합인 반면 합은 고작 1차 서류 통과다.시험 결과가 나빴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당장 낼 모레인 2차 시험이 더 어렵게 느껴지고. 사전 없는 번역시험은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불합이었다. 올해부터 사전을 쓸 수 없단 것도 방금 알았고. 이상한 일이다. 좋은 결과는 그다지 신나지가 않은데 나쁜 평가엔 마음이 크게 휩쓸리는 거. 게다가 불합 통보를 받고 누워 있는 동안, 그러고 보면 지난 몇 년간 해왔던 영화제 일에서 올해는 콜이 안 왔단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지금쯤 일을 한참 하고 있어야 하는 시점인데. 그랬더니 우울해졌다. 영화제에 가서 (스태프에게 주는 공짜 음료를 마음껏 먹으면서) 며칠을 보낼 기대를 당연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을 잘 못해서 그래, 하고 투덜거리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정도면 잘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또 하더라도 아마 작년에 한 것처럼 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올해는 영화제에 못 가겠네, 하자 y.가 시금털털하게 말했다. "왜 못 가? 가면 되지. 원래 영화는 돈 내고 보는 거야." 하긴 내가 뭐 언제부터 당연히 게스트라고. 가면 되지. 


- 평가에 대해 면역이 될 필요가 있는 것도 같다. 결과에 따라 희비가 크게 엇갈릴 평가를 받아본 일이 없다. 애초에 난 시험을 너무 싫어해서, 어지간한 시험은 결과에 연연할 기력도 없이 억지로 봤고,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시험들은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잘 볼 만한 것들이었던 것 같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부족한 부분을 메운다' 라는 과제를 좀 더 자주 생각해야 할 것 같다.요즘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은 원래 잘했던 일도, 내가 제일 잘 할만한 일도, 노력없이 대충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 꼼수 없이, 열심히 한 만큼만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일의 성과를 따지기 이전에 '열심히' 그것 자체가 어렵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래도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견디느냐면, 살면서 나는 제대로 못한 일들도 있었고, 사실은 잘 못 하는데 티가 안 나는 일도 있었고, 그냥 남보다 못하지는 않는 일, 운때나 감각이 좋아서 대충 했는데 잘 한 일, 잘 하게 태어나서 잘 한 일들도 있었고 정말 샅샅이 노력해서 잘 하게 된 일도 있었다. 그 중에서 잘 하게 태어나서 잘 한 일들은 못하는 방법을 몰랐고, 노력해서 잘 하게 된 일은 적어도 덜 잘 하게 됐을 때 억울하지 않았다. 둘 다 생각하면 '깨끗한' 기분이 들었다. 투명한 기분. 설명할 수 있는 기분, 말이 되는 기분.그래서 내 목표가 뭔지도 안다. 아마 태어나서부터 의심의 여지 없이 잘해서 어떤 경우에도 허물어질 수가 없을 만큼 잘하는 건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 일에 대해서 '깨끗한' 기분을 갖는 건 노력으로 되는 일이라는 걸 안다. 


- 어떻게 보면, 미래에 대한 상상은 어떤 종류의 것이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y.와 함께 하는 미래 역시 굳이 무슨 전도유망한 청사진이 있어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뭔지도 모르면서 노력하고, 상대편에서도 엇비슷하게 애를 써 주길 바랄 뿐이며,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엔 이렇게 노력하지 않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지. 나머지 일들에 관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음 좋을 텐데. 


- 오늘 아침에 '브레인피킹'에서 본 제이디 스미스의 글쓰기 10계명. 내 인생 그리고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블로그 방문자 김병운의 인생에 도움이 되고자 가볍게 옮겨둔다. 볼드체는 내가 맘대로 넣은 거.  


1.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라. 다른 무슨 일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책 읽는 데 써라.


2. 어른이 되면 자신의 글을 모르는 사람의 글처럼 읽고, 나아가 적이 쓴 글처럼 읽어라.


3. 당신의'소명vocation'에 낭만적으로 사로잡히지 마라. 좋은 문장을 쓰거나, 못 쓰거나, 둘 중 하나다. '작가의 생활방식' 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종이 위에 무엇을 남기는가가 전부다.


4. 취약한 지점은 피해라.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가치가 없다고 자기합리화하지 마라. 자기혐오를 경멸로 덧씌우지 마라.


5. 글을 쓰는 시점과 고치는 시점 사이에 상당한 간격을 두어라.


6. 패거리, 모임 등을 피해라. 패거리가 있다고 해서 글을 더 잘 쓰게 되는 건 아니다. 


7.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컴퓨터로 글을 써라.


8. 글 쓰는 시간과 공간을 보호해라. 아무리 중요한 사람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9. 명예와 성취를 혼동하지 마라.


10. 어떠한 장막이 가리우더라도 진실을 말하라.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영원한 슬픔을 받아들여라.


- 이건 더 흥미로운데, 헨리 밀러가 생각보다 열심히 체계적으로;; 작업 계획을 썼다는 걸 알게 됐다. 작업노트에 적힌 그의 11가지 약속. 버릴 게 없다. 


1. 작업은 한 번에 한 가지씩 끝내라. 


2. 더 이상의 새 책은 시작하지 말고, <블랙 스프링>에 새로운 내용도 덧붙이지 말라 


3. 불안해 하지 말라. 어떤 작업에나 침착하고, 즐겁고, 무모하게 임해라.


4. 기분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따라 작업해라.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멈춰라! 


5. 창조할 수 없어도 작업할 수는 있다. 


6. 거름fertilizer을 더하는 것보다는 매일 좀 더 단단하게 굳히는 편이 낫다. (*누가 읽을진 모르겠는데; 정리되지 않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려놓는 것 보다는 이미 쓴 글을 좀 다듬고 단단하게 만드는 데 시간을 쓰라는 뜻)


7. 인간성을 지켜라. 사람 만나고, 돌아다니고, 술 마시고 싶을 땐 마시고.


8. 마차 끄는 말이 되지 말고 즐겁게 일해라.


9. 내키지 않으면 프로그램을 등한시해도 좋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다시 프로그램으로 돌아와라. 집중하고Concentrate, 범위를 좁히고Narrow down, 소거해라Exclude


10. 쓰고 싶지 않은 책은 잊어라. 쓰고 있는 책만 생각해라. 


11. 글쓰기를 언제나 맨 앞아 놓아라. 그림, 음악, 친구, 영화 등은 전부 그 다음이다. 


- 그래서 그 '프로그램' 이 뭐냐면, 이렇게 아침, 오후, 저녁으로 나눠 놓은 루틴. 역시 버릴 게 없다 22 


<아침>

- 잠이 덜 깨서 정신이 없다면: 자극을 얻을 수 있도록 메모를 쓰거나 정리해라.

- 상태가 괜찮다면: 글을 써라.


<오후>

- 꼼꼼히 계획해 둔 항목에 맞추어 지금 작업 중인 항목을 작업해라. 아무 방해도 받지 말고, 딴짓 하지 말고. 한 번에 한 항목씩 끝낼 수 있게 작업해라.


<저녁>

- 친구를 만나고, 카페에서 책을 읽어라.

- 낯선 동네에 가라. 비가 오면 걸어서, 맑으면 자전거를 타고.  

- 기분이 괜찮으면 글을 써도 좋지만 마이너 프로그램으로만 진행해라. (*메이저 프로그램, 마이너 프로그램, 페인팅 프로그램 이런 식으로 섹션을 나눠 놓은 듯) 

- 공허하거나 피로하다면 그림을 그려라.

- 메모 작성, 표 작성, 계획 짜기, 원고 수정. 


주의) 낮 시간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박물관에 자주 가고, 스케치를 자주 하고, 자전거를 자주 타라. 카페, 기차, 길거리에서 스케치를 해라. 영화는 줄이고! 자료조사를 위해 일 주일에 한 번 도서관에 가라.  


- 여기서 잠깐 헨리 밀러의 노트를 보시고요. (글이 길면 지루하니까) 



- 스타인벡도 무슨 말을 남겼다.


1. 완성할 수 없는 아이디어는 버려라. 400페이지는 잊어버리고 매일 1페이지만 써라. 완성한 것만으로도 놀라움에 찰 것이다.


2. 가능한 한 자유롭게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종이 위에 쏟아내라. 전부 다 쓰기 전까지는 수정하거나 고쳐쓰지 마라. 집필 중에 앞부분을 고쳐 쓴다는 건 사실 대부분 글을 진행하지 않는 핑계가 된다. 또, 도중에 글을 고치면 주제와의 무의식적인 연상에서만 발생하는 흐름과 리듬을 깨뜨리게 된다. 


3. 일반 청자라는 개념을 잊어라. 이름도 얼굴도 없는 청자 상상하면 겁에 질리기 때문이며, 극장과는 달리 글쓰기에서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있어서 여러분의 청자란 단 한 사람의 독자다. 때로는 한 명의 독자, 실제로 아는 사람이나 상상의 사람을 독자로 상정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써도 도움이 된다


4. 어떤 장면이나 항목이 감당이 안 되는데 여전히 이를 유지하고 싶다면 일단 건너뛰고 진행해라. 끝까지 쓰고 난 다음에 다시 돌아오면 그 부분이 어려운 이유가 이 글에 알맞지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5.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지는 장면, 다른 부분보다 더 마음에 드는 장면을 조심해라. 그 장면이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6. 대화를 쓸 때는 쓰면서 소리내서 읽어 보아라. 그래야 대사가 말의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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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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