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렐라

진흙 얼음 2010. 7. 24. 07:23

미렐라는 불가리아에서 왔는데 우리는 모두 그녀를 싫어했다. 거만하고 눈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자신이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갖고 있는지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는지 자신의 클래스가 얼마나 높은지를 자랑했고 그것은 내가 싫어하는 화제이기도 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의제가 나오면 "그런데 나 말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본 사람이 있긴 하니?", 그런 식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해 내가 "나는 영국에 온 게 처음이기 때문에 말을 잘 못해, 아직은 내가 어쩔 수 없지만 연습하면 나아질 거야, 너희들 말은 너무 빠르잖아 내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식이었다면 같은 문제에 대해서 미렐라는,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나는 모국어를 굉장히 잘하고 프랑스어를 비롯해 또 무슨어 무슨어가 굉장히 유창하다구" 라는 대응으로 일관했다.

 

 매사에 "오, 내가 한 일을 좀 봐, 나는 이것도 잘하고 이것도 잘하는데 심지어 이것까지 잘해! 나는 왜 이렇게 잘났을까! 혹시 너는 알고 있니?" 하는 미렐라를 내가 어떻게 좋아했겠는가. 나는 어느 날 도서관에 가는 길에 미렐라와 동행하면서 친해져 보려고 했는데, 미렐라가 먼저 날씨 얘기를 꺼냈다. 나도 동조하며 영국의 날씨는 호러블해서 오자마자 카디건을 사야 했다고 말했는데, 미렐라는 또 엄청 잘난 척 하며, "그런데 영국의 패션은 정말 끔찍해, 나는 삼십킬로그램의 옷을 가지고 왔는데 너무 추워서 입을 수가 없어, 그래서 여기서 청바지를 사 입었지, 오 이런 끔찍한 것을 난 결코 입지 않지만 이런 곳에서 만든 옷을 사입느니 차라리 미국에서 만든 청바지를 입는 게 나아, 난 영국을 떠나면서 여기서 산 옷을 모두 버릴 거야, 내 친구들이 이 몰골을 보면 내가 서커스를 하다가 온 줄 알겠지? 내 약혼자가 있는 빠리에서는 말야..." 하고 끝없이 말을 늘어놓기에 아, 얘는 아니구나, 하면서 닥치고 내 그룹에게로 가서 토마토 수프를 먹었다.

 미렐라는 늘 혼자 다녔다. 친구가 없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돌아와서 누구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렐라밖에 없다. 다녀와서 다들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멋진 할아버지 봅이나 담배 마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에르뎀 같은 이들을 기분 좋게 떠올리긴 하지만, 아, 나에게 우조를 주었던 그리스 인 엘레니, 내 수첩에 그리스어로 내 이름도 써 주었는데.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고 마지막 날 페어웰 파티에서도 다들 끌어안고 울부짖고 사진찍는 분위기에서 어서 나희를 만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얘들은 딱히 날 기억하지도 않을 거고 나랑 뜨거운 우정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이게 다 무슨 상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거기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고 망상했었다. 너무너무 예쁜 빨간 머리 여자애가 있었는데 나는 끝까지 눈으로 그 애를 쫓았지만 저녁을 한번 같이 먹었을 뿐 친해지지조차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발레리야, 그리고 러시아 인이었지... 그리고 그 저녁은 되게 끔찍했다, 예쁜 애랑 저녁먹느라 잔뜩 긴장했는데 난 영어도 잘 못 하니깐...

 
어느 날 미렐라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너는 즐겁니? 나는 아니야. 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아니, 여긴 호러블한 곳이고 강의도 호러블하고 난 집에 가서 내 고양이가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해. 그래서 그렇게 시작한 고양이 이야기는 ("그애의 이름은 물루야", "물루? 귀여운 이름이다", "그리고 오렌지색이야 눈 위에 있으면 불꽃 같아", "아, 고양이들은 사랑스러워 사람들은 작은 동물들에게 배워야 해") 미렐라의 강아지 이야기로 끝이 났는데, 그 강아지 이야기는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이 강아지는 어떤 꽃집에서 유리문이 열리는 틈을 타 탈출해 우연히 미렐라의 집에 왔다. ("강아지는 정말로 똑똑하고 용감했어, 왜냐하면 그 꽃집에서 우리 집은 무수한 마일만큼 떨어져 있었거든, 아주 추운 날이었는데 강아지가 꽃 속에서 나타났어, 강아지는 나를 만났기 때문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어") 마지막에 강아지는 차에 치어 죽는데, 미렐라는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갑자기 허리가 꺾어져라 웃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을 당혹하고 불편하게 하는 그녀다운 일이었는데 어쨌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 강아지가 도로로 달려갔고, 차가 그 위로 지나갔지! 그래서 내 강아지는 죽었어!" 하면서 미렐라가 깔깔 웃던 그 순간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얘는 너무 슬퍼서 아예 웃기로 한 걸까? 아니면 설마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은 동안에 이 강아지가 부활이라도 했나? 아무튼 그녀는 너무나 너무나 이상했고, 나는 이렇게 신기하게 이상한 그녀를 어쨌거나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그녀는 거만하지만 괜찮은 사람이었다. 말끝마다 "나는 특별하게도 아침엔 이걸 먹고 점심땐 이걸 먹고 그런데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영국의 이팅해빗은 호러블해, 내 약혼자가 있는 빠리에선 아무도 이따위 걸 먹지 않아" 하는 말만 빼놓는다면 그녀는 지적이고 진중하며 무엇보다도 내게 다정했다. 저녁 식사가 재미있어서 우리는 여러 접시를 먹고 또 먹고 나서도 한참이나 오렌지를 까먹으면서 저녁식사에 주어진 시간을 계속해서 연장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그 날 저녁에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비요르, 비요르, 어머나 나의 발음 좀 봐, 너의 아름다운 이름을 내가 발음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지만, 나는 내 발음이 너무 신기해서 참을 수가 없어!

 비요르, 혹시 밤에 무슨 일이 생기면 침대에 누워서 벽을 두드려, 그럼 내가 달려올게.

 네가 잘 자고 있는지 궁금해서 와봤어, 잘자 비요르! 너는 좋은 꿈을 꿔야만 해!   

 다음 날 아침에는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미렐라가 문을 두드렸다. 비요르, 네가 늦잠을 잘 것 같아서 내가 식당에서 너를 위해 과일과 차를 훔쳐왔어, 하면서 내 책상에 가방에 넣어온 사과와 바나나 같은 것을 잔뜩 내려놓았다. 이건 도둑질이고 특히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친구를 위해서 내가 해냈어, 요거트도 있었지만 오 나는 요거트를 싫어해, 그래서 가져오지 않았지, 하지만 사과는 정말로 즙이 많고 달콤해.

빠리에 있다는 미렐라의 약혼자는 여러 의미로 매일매일 정신이 나갔다 들어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침을 먹으러 내려갈 작정이었겠지만 미렐라는 자신이 가져다준 과일로 내가 아침식사를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런 식. 헤어질 때 미렐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건 내 명함이야 나는 큰 출판사의 중요한 직위에서 일해... 정말 보고 싶을 거야 비요르... 그리고 이건 내가 포엣츠 뮤지엄에서 너를 위해 산 카드야, 물론 이 카드를 사던 당시에는 너를 몰랐지만 이 카드에는 에드윈 모건의 시가 적혀 있고 너는 에드윈 모건이 좋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건 네 거야 이걸 한국에 가져가서 나를 생각해 그리고 꼭 내 명함에 있는 주소로 이메일을 써줘 아냐 네 명함은 꺼낼 필요 없어 어차피 난 너무 바빠서 명함을 잘 챙기지 못하니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내가. 그냥 미렐라, 하면서 팔을 벌렸고, 나는 불가리아에 대해 아는 건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불가리아에 가면 너를 찾겠지? 식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키가 나보다 머리 수 개는 더 큰 미렐라의 등을 토닥였다. 나는 너에게 줄 것이 없어, 내 방에 가면 내가 로열 마일에서 산 네시를 본딴 조그맣고 파란 물건이 있는데...  

 노 땡큐, 나는 네시를 싫어해 정말이지 네시라니!

 (무안해진 나) 맞아 네시는 존재하지도 않을 거야 이런 것을 끝없이 만들어서 팔다니 정말 우습다.

 

 

 한국에 돌아온 다음 날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니 <네스 호에서 네시 목격!> 이라는 최신 가십 기사가 떠 있었다. 그건 정말 우스웠다. 그 네시는 미렐라의 명함과 함께 작은 깡통 안에 들어 있다. 청소를 하면서 그것을 열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이렇게 써봤다. 에드윈 모건의 시가 적인 카드는 내 눈 앞에 있고. 나는 미렐라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 하겠지만 가끔 미친 미렐라를 생각하고 미렐라에 대해서 쓰기도 하겠지.

 

 

 물론 아름다운 발레리야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쓸 말이 없다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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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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