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비가 들어와서 과외 교재 두 권 사고 커피 두 잔(과외 학생과 수업하며 나눠 마셨다), 극세사 양말 한 켤레, 그리고 헌책방에서 이천 원 짜리 책 한 권 샀더니 천 원 남아서 폴에게 주어 만두 사러 보냈다. 중학교 일진같은 일이지만 일진이 되기엔 지금 난 이런 찐따도 없다. 그래도 거스름돈 남겨오란 말까진 하지 않았어.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남이 사 놓고 방치한 수학책 두 권을 샀다. 

 집세에 대한 각종 오뇌를 제외하면 요즘 소비생활은 썩 훌륭한 편이다. 술과 커피를 마시는 데에 아주 조금 사치하고, 플러스펜과 도루코 커터칼과 보난자 연필 따위를 더즌 단위로 사 두었고 예비 몰스킨 노트들도 있고, 청소를 하면서 쇼핑백 네 개에 달하는 노트들 및 토기가 밀려오는 양의 이면지를 챙겨 놓았더니 내가 더 이상 문방사우에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머리 모양도 마음에 들고 한동안 중국인 관광객처럼 쓸어담았던 화장품은 오직 유통기한이 문제며 옷도 귀찮고 방 청소 하면서 책이 너무 많아서 한 번 울었더니 이제 책은 사는 물건이 아니라 버리는 물건이겠다. 

 양과 토끼의 털로 몸을 두르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서 왜 나는 두 시간 밖에 못 잤는지 생각하였다. 크리스마스 파티 하고 싶어, 남의 생일 축하하면서 나무를 존나 베고 싶다. 그치 그러나 난 전나무건 졸참나무건 가리지 않고 사랑한다, 되고 싶은 건 스페이드의 여왕, 저치의 목을 베고 또 베고 또 베는 게 생태주의적 측면에서 보다 나은 일 아니겠나.  

 시각장애인과 현직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과외라고 쓰니 내게 장르적 전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진 않다. 수업료는 둘이 합쳐서 입시생 한 명 몫인데 그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어리석고 이 어리석음에 마음이 편하다. 사실 고액 과외를 고품질 과외로 혼동하느라 수고가 많은 입시생과 그의 학부모가 아니라면 내게 두 배의 돈을 지불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우린 좀 그렇다. 과외선생일 때는 시급을 '쎄게' 부르려고 두근거리는 주제에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고 누구에게 수업받을 마음은 없잖나. 내가 인생에서 자행하는 온갖 부당행위들 중 단 한 가지라도 줄이겠다는 거다. 그리고 수업료가 낮다는 건 몇 가지 괜찮은 생각들도 불러온다. 첫째, 난 돈에 마음을 팔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진심으로 팔진 않았다는 것. 둘째, 자신할 수 있다. 내 수업은 수업료에 비해 썩 괜찮고 어쩌면 같은 수업료를 지불하는 수업 중 가장 유익한 수업일 수도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하고 있는 수업들이 전부 괜찮다, 대학원생이 겪을 수 있는 스트레스들 중 가장 고위험군에 속하는 과외 스트레스를, 이번 수업들에서는 별로 받은 적이 없다. 학생 둘 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같은 학교 학생으로, 한쪽은 늦깎이 졸업반이고 한 쪽은 나랑 학번도 졸업시기도 같다. 그녀들이 경제적으로 큰 여유는 없다며 조심스레 부른 수업료보다 더 낮은 수업료를 받는다. 내 쪽에서도 스타킹 잘 챙겨신고 선생님 행세 해야 하는 입시과외보다는 학교 스타벅스 같은 데서 브라우니나 잘라 먹으며 간간이 학교욕도 하는 거 얼마나 좋나. 

 과외 1은 지난 학기 내내 그애의 <대학영어> 수업 보충을 위주로 이루어졌다. 구술시험이나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 위주로 준비했지, 사실 체계적인 강의를 할 겨를이 없었다. 학교의 시각장애인 정책이 얼마나 미비한가 하는 사실에 놀랐다. 중간고사 직전까지 점자교재가 완성되지 않아서 공부가 불가능한 정황이었다. 시험에 관해서도 교양영어실과 충돌이 조금 있었고, 아직도 헤어질 때 인사하며 나 혼자 양손을 팔랑팔랑 흔들다가 머쓱해하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에 그 애를 요철에 걸려 넘어지게 할 뻔 했던 것에 비하면 팔짱 끼고 복지카드 찍고 전철에 태워 보내는 기술 등등도 늘어났다. (그리고 장애인 복지카드를 사용하면 안내인도 공짜로 탈 수 있는 것 같다) 종강하면 계절학기 <고급영어>를 돕게 되고, 수업에 변동이 없다면 다음 학기엔 그애의 대학원 수업과 토플시험을 같이 준비할 거다. 

 과외 2는 막 시작했는데 괜찮다. 서로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문법교재는 English grammar in use를 쓰고 있고 애초 회화교재인 let's talk을 독해와 작문교재로 사용한다. 문법과 작문이 중요한데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영문법 기초의 중요성은 아무리 역설해도 지나치지 않고 작문은 영어공부의 꽃이다; 영어회화를 미드 배우들처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면 감정과 의사를 글로 쓸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처음에는 자기 소개를 숙제로 내는데 초딩이건 직장인이건 하이 내 이름은 블라블라고 1남 1녀의 장녀이며 취미는 음악감상이다, 라고 쓰는 건 똑같다. (어째서 모든 사람들의 취미는 음악감상인가) 그래도 별 상관은 없는 게, 지독하게 계속 쓰게 시키면 작문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무엇보다 영어로 글을 쓴다는 두려움이 극복된다. 그런 식으로 생각과 종이 위로 옮긴 문장들 사이의 간극이 서서히 좁아지는 것이다. 외국어 공부에서 그보다 나은 결과가 있나. 

  세상엔 가능한 한 빨리 떼는 게 앞으로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문법책이다 헉 쓰고 보니 생각보다 더 거지같은 비유지만 한점 의혹의 여지도 없는 충언이다. 


 풉.

 있지, 정말 많은 것들에서 결국 느껴지는 건 내 실책들이다. 오직 그것만이 나를 찌른다.

 드라마타이즈하려는 욕구가 치명적인 까닭은, 그것은 이후의 삶이 정말로 '살아지는' 것이기보다는, 단 한 번의 극적인 운동을 통해 나머지를 그 관성으로 어떻게 끌고 가려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일들은 언제나 너무 가혹하고,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연약한데, 우리가 결코 버릴 수 없는 나쁜 습관들도 결국 보수적인 자기애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대로는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이제 겨우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나는 알바에 눌린 순록이라 바삐 일하러 간다. 



 일하러 가기 전에 딱 하나만 더 쓰자면 어제 헌책방에서 이천 원 주고 산 것은 60년도에 발행된 백경 국역본. 여전히 멜빌에 매달리고 있고 일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을유문화사 전집의 한 권인데 불행히도 나는 한자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서 역자 성명은 모른다. 우리들의 고래 존함이 모비-디크라 쓰여 있는 세로쓰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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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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