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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2회 남은 <구름을 타고>를 꼭 보고 싶었는데 티켓이 5만원. 사람들은 어떻게 뮤지컬 같은 걸 그렇게 잘 보는지 진짜 모르겠다. 아무튼 5만원은 지금 나한텐 너무 어려운 지출이라 오늘 낮에 4석 남은 예매창을 보면서 고민하다가 하,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면서 그만뒀는데 뜻밖의 행운. 요약하자면 모두 안하던 짓을 해서 생긴 일이다.
도서대출 기한이 한 달인 번역도서관에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책을 반납하고 빌리는 날이 오늘이었다. 2호선 반대편은 나한테 지구 반대편 같은 데라서, 원래는 이 년에 한 번이나 갈까 말까 하던 곳. 아무튼 낮에 가서 천천히 책도 볼랬는데 갑자기 급한 번역이 들어와서 딱 폐관시간 직전에 도착하게 움직이게 됐다.
당연히 내 용건은 십 분만에 끝났고, 가는 덴 한 시간이 걸렸으니까 되게 지치고 허무했다. 급히 나가느라 안경 끼고 앞머리는 머리는 실핀으로 올린 몰골이어서 어서 집에 가는 수밖에 없는데 직장인 퇴근 시간에 다시 전철 타고 왔던 방향을 갈 엄두가 나지 않는 거다. 눈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혜화까지 가는 버스가 있더라. 일단 거기까지 가려고 탔다. 대중교통 중에서도 버스는 정말 싫어해서 한 달에 딱 한 번 누가 꼭 버스 타자고 해야 탄다. 그것도 홍대-종로 구간 이상을 버스로 이동하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되나. 그런데 오늘은 그 버스 안에 한 시간을 앉아 있었다. 청담동에서부터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마침 핸드폰이 꺼졌고 나는 강남의 길찾기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죽고 싶은 심정으로... 아 그냥 장충동(거기쯤 오니 다시 자신이 생겼다)에 내릴까, 하다가 혜화로터리까지 왔다.
그쯤에서 좋은 생각이 났다. 이왕 온 거, 성대 앞의 좋아하는 김밥집에 가서 먹을 걸 산 다음 극장에 있는 y.를 만나서 같이 놀지 뭐. 일단 거기까지 가면 근처에서 빈둥거리든지 책 읽든지 앞에 티켓 할인 되는 카페도 있고... 뭐 이런 생각으로 김밥집에 가려는데, 이번엔 또 발이 너무 아픈 거다. 번역 때문에 급히 나가느라 길 안 든 스니커즈 신고 나와서다. 그래서 또 그냥 극장에 갔다. 짠 하고 나타났더니 y.는 환상인 줄 알았다고 했다.
아무튼 극장 앞에서 y.의 운동화랑 바꿔 신고 김밥집에 갈랬는데 그냥 걷기가 너무 싫어서... 걍 편의점 가서 과자 사올게 하면서 편의점 가고 있는데 배우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구자를 딱 마주쳤다. 어디가요? 공연보러요. 뭐봐요? 배우들은 <다우트>보고 전 <구름을 타고>보려구요. 아! 그거 나도 진짜 보고싶었는데, 아우 안되겠다 나도 보러갈래요! 보지뭐! 그렇게 해서 신나게 남의 신발 신은 채로 공연을 보러 간 얘기다. 되게 별 얘기 아닌데 왜 이렇게 신났었냐면,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가 않았던 날인데 어쨌든 공연을 봤다. 번역이 안 들어왔거나, 도서반납을 미루고 집에 있었거나, 지하철 탔거나, 핸드폰이라도 켜졌거나, 김밥을 샀거나, 편한 신발이라도 신었더라면 없었을 일. 심지어 낮에 큰맘먹고 티켓을 예매해 버렸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구자가 할인해줘서 50% 로 봤거든. 교훈은 사람은 역시 즉흥적으로 살아야 득을 본다는 것이다. (할인을 받았지만 결국 공연이 끝나고 치맥을 먹었다 쩜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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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본 <구름을 타고>는 아주 좋았다. '별이 좋아할 것 같다' 고 들었던 까닭을 잘 알겠다. 이야기를 하는 방법들,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방법,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조직하는 방법,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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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자체는 다른 작품들에 빗대어 생각할 게 많은데, 오직 5만원이란 티켓값 때문에 사실 <네크로슈스 햄릿>을 생각하고 있었다. 9년 전이었고 나는 그게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5만원은 그 때 내게 더 큰 돈이었다. 그런데 어떻게든 마련을 해서, 혼자 엘지아트센터에 갔고, 시선의 일부를 바가 가리고 있는 2층 맨 앞줄에서 그걸 봤다. 살면서 나는 좋은 공연을 어느 정도 보았을 것이고 점점 더 잘 볼 줄 알게 됐지만, 이십대 초반에 본 그 공연만큼 실제로 나의 인생에 영향을 준 공연은 없는 것 같다. 우선 <햄릿>무대를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몇 년 동안 그때 본 것들을 생각하다가 결국 드라마 전공을 하겠다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그 사달을 낸 것이다. 늘 희미하게 의심하고 있었던 '저기에 이렇게 빛나는 세계가' 를 처음 분명하게 확인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점점 강해지는 그런 의혹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그런 걸 보는 데는 5만원이 든다. 와... 9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아직도 그게 그렇게 큰 돈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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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술을 마셨고, 글을 썼다. 쓴 것 중 일부는 읽어 뒀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적어두려고 한다.
술을 마셔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글을 써서 술을 마실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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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잠도둑
1) <솔로몬의 위증> 마지막 권은 새벽까지 읽다가 못 참겠는 순간 잠깐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마저 읽었다.
2) 아이슬란드에서 빅히트를 기록한 토라 시리즈. 아까 검토가 들어와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엄청 흥미진진하고 어엄청 못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