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새
sett
별__
2011. 1. 25. 01:33
며칠의 일기들은 복잡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되어 있었다. 내내 치미는 것들을 삼켰다, 그러니가 그건 또 한 순간 끔찍하게 로맨틱하나 지지부진한 통속극으로 끝나는 드라마다. 세이브할 겨를도 없이 굉음과 함께 날아갔으니 결코 상연되진 않았다. 잠시 붓과 물감이라도 들고 뭐라도 복구하려는 동안 그렇게 되었다. 황망하긴. 잘 됐다. 배우이자 연출가이자 야유하는 관중까지 되고 싶지는 않으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트테라피라면 이건 무슨 종류의 요법인 걸까. 연쇄살인범과 숫자에 경도된 방화범들, 복수극, 치정살인들 앞에 마취에서 못 깨어나는 환자처럼 앉아 있었다. 언젠가 치과 의자에 누워 피를 질질 흘리며 <프리즌 브레이크>를 봤다. 잇몸 안에서 부서진 영구치를 발치하는 중이었는데, 두어시간이 흐르도록 나는 탈출할 전망이 없는 것이었다.
<크리미널 마인드>의 첫 시즌 파일럿에서는 베케트를 인용하더라. 더 잘 실패하라고? 설마. 실망이나 수치, 두려움과 당혹에 비하면 분노는 번듯한 감정이다. 정직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며칠째 노여워하기로 한다. 입술에서 심장까지 깨끗하게 내리그인 환부는 상상의 것들이다. 숙련된 프로파일러들은 그걸 뭐라고 부를까.
밤 화장품들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건네주면서, 친구는 너는 왜 생의 모든 단계에서 hard mode를 옵션으로 택하느냐 물었다. 내가 쓸데없는 오기와 과부하를 몸에 얹어대며 대학원 생활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으니까.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넌 그냥은 안 해, 최소한 intermediate 정도는 걸어 놔야 조이스틱을 잡는 것 같아.
그리고 망하는 거지, 너는 많이 훌륭하고 많이 멍청하니까.
침대 프레임에 느슨하게 기대 있다가, 내가 왜 멍청해, 하며 고개를 드는 찰나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치고 나니 멍청하게 헤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눈길을 위에서는 깨끗한 불빛도 어둠도 무엇의 은유나 신호처럼 보이고, 그래서 자꾸만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옛사랑들 혹은 그에 준하는 자들은 적어도 잠 속에서 울면서 고양이 이름을 부르거나 웃는 사람처럼 가쁘게 숨쉬는 (그리고 죽은 사람처럼 오전을 보내는) 나쁜 습관들을 양해한다. 혹은 내가 절대로 놓치지 않는 망할 기회들에도 익숙해져서, 묻거나 질책하지 않고 다만 뜨거운 차 한 잔이나 깨끗한 베개를 내놓는 친구들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 얌전히 붙어 있는 편이 낫지만 나는 사지를 뻗고 편안히 누우면 끝없이 신경으로 폐곡선을 그려대는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다.
블라인드 너머로 대강 아침 빛이 밝는데 잠든 친구의 서가에서 유진오닐을 꺼냈다. 그-와-나도 (혹은 그-도-나도)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지 않았었나. 명동예술극장의 R석 옆자리에서 그는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다가 배우가 입을 여는 순간에 맞추어 브루터스, 하고 발음햇다. 그래, 브루터스. 나도 그 대사를 알고 있다. 우리는 종종 탄식조차 옛 거장들에게서 훔쳐오니까.
타이런: (딱딱거린다) 또 그런 소름끼치는 소리를! 생에는 아무런 흠결이 없어. 그건 우리의-- (인용한다) "잘못은, 친애하는 브루터스, 우리의 별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네, 다만 자기 자신 때문에 우리가 하찮은 인간인 것이지" (사이, 슬프게) 에드윈 부스가 나의 오셀로에 했던 찬사야. 매니저에게 정확히 받아쓰도록 시켜서 몇 년이나 지갑 속에 지니고 다녔어. 자주 꺼내 읽었더니 마침내 어느 날은 그 말을 이해했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더군. 지금 그건 어디 있을까? 아마 이 집 어딘가에 있을 텐데. 조심히 어디 두었던 것 같은데--
자신이 에드먼드라고 여긴다고 자백하는 사람들... 의... 여로... 의... 중추... 를 가로지르며,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욱 더, 라는 말은 좁고 긴 리본 위에 붉은 글씨로 끝없이 반복된다.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욱 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욱 더. 이건 눈물을 흘려도 좋은 얘기다. 그리고 하드모드다.
베케트의 유명한 인용은 Worstward Ho, 라는 산문에서 따온 것이다. 절판으로 결국 갖지 못한 그로브 센터너리 전집에서는 4권에 실려 있을 거다. 베케트는 자코비안 시대의 희곡인Westward Ho의 패러디로 이 제목을 지었다. 그리고 Westward Ho! 는 데본 주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이다. 마을 이름에 느낌표가 붙다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이다.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는 명령문은 실은 명령이 아니라 고백이다. All of old, Nothing else ever.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라는 원문을, 주석을 참조해 정교하게 번역해 보려는 밤이다: 모든 것이 오래된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달리 아무것도 시도한 적 없었고, 달리 아무것도 실패한 적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또 노력하리라. 또 실패하리라. 더 잘 실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