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얼음

oranges

별__ 2011. 12. 2. 22:15

 에딘버러에서의 날들은 근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로 시작되어서 급격히 가장 외로운 나날로 접어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이 멀리서 보면 어떤 색의 점으로 찍혀 있을지가 궁금하다. 그 날들을 견디며 절반 정도를 보내고, 헌책방을 찾아가 수상하게 생긴 서점 주인에게 지넷 윈터슨이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책이 있다면 아무거나 달라고 했다. 그는 아무렇게나 쌓인 책 더미에서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랜덤하우스 초판을 꺼내주고 나에게 4.99파운드를 받아갔다. 그러니까, 내가 에딘버러에서 오랫동안 읽은 책들은 두 권이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와 에딘버러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앨리스 B. 토클라스의 자서전>(거트루드 스타인)....
 
 이 년 하고도 몇 달이 지났고 윈터슨 자서전을 영국에서 배달받아 읽는 저녁이다. 윈터슨이 도서관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을 빌리는 장면. 이런 일조차 나를 덜 외롭게 만드는 겨울.


*
 "거트루드 스타인이 누군데요?"
 "모더니스트예요. 의미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썼지요."
 "그래서 스파이크 멀리건과 같은 유머 섹션에 놓여 있나요?"
 "듀이 분류법 안에도 약간의 재량은 있으니까요. 유머 역시 거트루드 스타인의 강점 중 하나예요. 독자를 혼란에서 구하고 생각의 자유를 열어주지요. 제 전임자는 'A-Z까지의 영문학'에 묶이는 모더니스트가 되기엔 거트루드 스타인은 너무 모던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덧붙이자면 그녀는 영어로 글을 썼지만 미국인으로, 빠리에 살았어요. 지금은 죽었죠."
 나는 <앨리스 B.토클라스의 자서전>을 다시 차에 싣고 래틀로우 부인네로 향했다. 나는 선뜻 들어가지 않고 잠시 밖에서 머뭇거렸다. 래틀로우 부인이 아이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엌 창문으로 작고 소박한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워터 스트리트처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려 있는 작은 별장 같은 집이었다. 덩치가 산만한 아들들은 저녁을 먹고 있었고, 래틀로우 부인은 다림질을 하며 다림판 앞에 세워둔 악보대에 셰익스피어를 올려놓고 읽는 중이었다. 그녀는 폴리에스테르 재킷은 벗고 반소매 나일론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팔은 통통했고 군데군데 옴폭 파인 자국이 있었다. 느슨하게 주름진 가슴은 붉고 육감적이었다. 나보코프라면 치를 떨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셔츠 하나를 끝마칠 때마다 손을 멈추고, 페이지를 넘기고, 옷을 걸고, 옷무더기에서 다른 셔츠 하나를 꺼내왔다.
 그녀는 폭신폭신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흑백 리놀륨 위에 놓인 분홍빛. 
 그녀는 내게 하나의 기회였다. 겨울이 오고 있었고, 차 안에서 자기엔 추웠다. 숨을 쉬면 수증기가 응결했고 아침이슬이 맺힌 나뭇잎처럼 나는 물투성이가 되어 깨어날 것이다.
 나는 내가 하려는 일이 옳은 것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소리내어 혼잣말을 했고 가끔은 자기 자신과 말싸움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교회에서 배운 것은 우리가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축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나는 밤에 침낭 속에 기어들어 잠을 청할 때마다 그렇게 했다. 좋은 일들도 있었다. 제니가 있고, 책이 있었다. 집을 나오는 것은 내가 두려움 없이 둘 다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
 나는 뒷마당이 내다보이는 작은 방을 얻었다. 나는 책을 꺼내 쌓아놓고 옷을 개었다. 청바지 세 벌, 신발 두 켤레, 점퍼 네 벌, 셔츠 네 벌, 일주일 치 양말과 속옷. 그리고 더플 코트 한 벌.
 "이게 끝이니?"
 "깡통따개랑 그릇 몇 개, 캠핑 스토브, 수건이랑 침낭이 있는데 차에 두면 돼요."
 "뜨거운 물병이 있어야겠다."
 "있어요. 손전등이랑 샴푸도 있구요."
 "알았다. 그럼 잼 바른 빵 좀 먹고 일찍 자렴."
 내가 거트루드 스타인을 꺼내는 것을 그녀가 보고 있었다.
 "에스(S.)" 그녀가 말했다.
 거트루드와 앨리스는 빠리에 살고 있다. 그들은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적십자와 협력한다. 그들은 미국에서 배로 실어온 2인승 포드를 몬다. 거트루드는 운전을 좋아하지만 후진은 싫어한다. 그녀는 오직 전진만을 한다, 이십세기의 가장 중요한 점은 진보라고 그녀는 생각하니까.
 거트루드가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일은 지도를 보는 것이다. 앨리스는 점점 인내심을 잃는다. 그녀는 지도를 집어던지고 거트루드에게 소리친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거트루드는 운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말한다. "옳은 길이건 잘못된 길이건 여기는 길이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