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얼음

o gentle reader

별__ 2012. 11. 8. 02:30



 나의 마이크로 코스모스 기준으론 천문학적인 연체료를 납부하고, 다시 도서관 사용자가 됐다. 기웃거리다가 좋아하는 자리를 드디어 정했다. 3층 영문학 서가 구석, 버지니아 울프 옆자리다. <3기니>나 <자기만의 방>을 제외하고, 버지니아 울프가 쓴 짧은 에세이들을 읽은 것은 처음인데, <기울어진 탑>이나 <현대 문학>같은 통찰력 있는 에세이들을 새로 발견했고 (앞으로 다시 읽을 일이 여러 번 있을 것 같다), 그녀가 동시대와 이전 시대의 여자들에 대해 쓴 글 (크리스티나 로제티, 두 브론테, 캐서린 맨스필드, 그리고 뉴카슬 공작부인)은 무척 아름답고 힘이 있다. 금욕적인 낭만주의자 브론테와 수줍고, 종교적인 열정으로 단단하게 매김된 로제티의 대조도 인상적이지만, 뉴카슬 공작부인이라는 괴상한 여인의 생애를 재구성한 짧은 글에는 애정이 넘친다. 그녀는 문학적 재능이 없는 것에 가까웠으나 글쓰기와 살아가기에 거침이 없었고, 그래서 (수정을 거치지 않은) 방대한 저작들을 남겼다고 한다. 그녀는 조리가 없었고, 지나치게 당당했으며, 수상한 옷을 입고 다녔던 것 같다.  "그녀는 주로 요정들하고만 어울렸다--그녀의 친구들은 죽은 자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의 언어가 거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의 철학이 무용지물이고 그녀의 시가 주로 무미건조하다고 해도 방대한 양의 공작부인의 작품은 순수한 불길에 의해 발효되었다. [...] 그녀에게는 새 대가리만큼의 지능과 머리가 돈 듯한 기질과 함께 뭔가 고상하고 돈키호테처럼 희한하며 대단한 점이 있다. [...] 끔찍한 비평가들이 계속해서 그녀를 비난했다. 그런 비평가 중에는 우주의 특성에 대해 근심할 만한 지능을 가진 사람도, 쫓기는 토끼의 고통에 대해 지푸라기만큼의 동정심을 가진 사람도, 또는 그녀처럼 '셰익스피어의 광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 사람도 거의 없다. 이제 적어도 그들만이 전적으로 비웃을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에세이들 중 몇 편은 <일반 독자>라는 표제의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던 것이라는데, "문학적 편견에 오염되지 않은" 독자로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은 감동을 준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 "문학의 애호가와 (예비) 연구자" 사이의 긴장에 관해 생각할 기회가 있었던 일도 떠오르고, 몇몇 낭만주의 시인들은 그들이 받고 있는 찬사와 오해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실천적인 비평가였다는 사실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위치해 있다고 믿는 미묘한 자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도서관 연체료를 납부한 뒤 처음으로 빌린 책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이다. 나는 실은 시대물만 제외하고 그녀의 책들을 거지반 읽은 것 같은데, 이번엔 가벼운 단편들부터("선인장 꽃" 이라는 단편은 정말 좋았다), 무거운 것으로는 사회파 장편인 <이유>를 읽었다. 그 여사는 진심으로 사람들의 선의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겐 제 나름의 사유가 있다고" 믿고, 그걸 안쓰러워하는 것 같다. 지난 한 달은, 그런 애매한 입장조차 도움이 될 일들이 많았다.



'문학하는 마음을 가진 채로', 원에서 졸업하는 것이 목표다.

 말과 마음을 아주 많이 줄여야 할 것이다. 

 

오 선한 독자여 (O gentle reader) 라는 워즈워스의 돈호는 종종 잊고 있던 일들을 일깨운다. 지금은 "사이먼 리" 마지막 두 연만 옮겨놓고 싶다. 


"벅찬 일을 하시는군요, 사이먼 리 영감님. 

그 곡괭이를 이리 주시지요." 그에게 내가 말했다.

그리고 말이 나오기 무섭게 그는 내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나는 곡괭이를 내리찍었고 단숨에 

얽힌 뿌리를 잘라내었다.

그 가여운 노인이 그렇게나 한참을 

헛되이 애쓰고 있던 뿌리를 말이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그 가슴에서 감사와 칭찬이 흘러나와 

마치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 나는 불친절한 마음, 친절한 일에도 

냉담한 반응만 되돌려주는 사람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아아! 사람들의 진실한 감사 때문에

나는 이따금 비통할 때가 있다 



얼마 전에 '남의 사정은 알지도 못하는' 어떤 권위자로부터 "인생의 비전은 찾았느냐, 아니면 그러지도 못하면서 그냥 놀았느냐, 공부를 계속할 생각은 있는 것이냐, 본인의 사정만 생각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는데, 길 가다가 처맞은 기분이었지만, 아무튼 훈계는 먹힌 셈이다, 그런 권위자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에 확신을 더했으니까. 


820번대 서가 사이에 다리를 펴고 앉아 있을 때 불안하고 편안하다, 마음은 자주 서성거렸지만 그래도 그 곳을 벗어난 적이 없다. 워즈워스가 노래한, "수녀들은 수도원의 좁은 방을 괴로와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구속감이다. 


내가 속한 곳을 맹렬히 미워하지 않으리라 '애쓰지 않고도' 계속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