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__ 2013. 10. 23. 20:22




 맥주의 계절이 끝나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가르치는 중학생에게 완전히 말리고 돌아온 저녁에 앱솔루트 보드카를 한 병 샀다. 


 y.와 나는 어쨌거나 꽤나 잘 맞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 다른 점들 중에서 핵심적인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행위를 제외하고 취미로 꼽을만한 건 연극 관람 뿐인 내가 연극배우랑 사귀는 건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 그밖에는 정도와 분야의 차이가 없진 않지만 둘다 영문번역과 영어과외로 밥벌이를 하기 때문에 때에 따라 새끼치기+아웃소싱이 가능하고, 요즘은 집에서 y.가 번역문 리딩을 해주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내 말투가 워낙 문어체이기도 하고, 일상어 표현에도 번역투가 많아서 (그건 창작자답게 곤조있는 언어세계라고 생각하지만) y.가 "나는 <예컨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렇게 많이 쓰는 사람은 처음 봤어," 라고 지적하기 전에는 그런 줄도 몰랐다. 이번 번역문에서도 however, ultimately more realistic을 "그러나 결국 보다 현실적인 것은~" 으로 무심코 옮겼을 때, (비록 원문에 충실하긴 하나) "말할 때 진짜로 <그러나> <결국> <보다>를 붙여 쓰고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라는 말을 듣고 수정하게 됐다. 


 번역 얘기. 첫 책이기 때문에 사실은 자문을 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고, 나를 가장 괴롭고 불안하게 하는 일 (여러 가지 선택지 속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결과더라도, 읽는 사람에게 경솔한 실수로 보일 수 있다는 점)때문에 초장부터 진이 빠질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서 가급적 혼자 힘으로 짠 해내고 싶었던 게 사실인데, 결국 일단은 내 선에서 정리하고 출판사에 보낸 다음에 일정이 허락하는 한 여기저기에 리딩을 부탁하기로 잠정적인 결정을 내렸다. 다행히 부탁할 만한 사람들이 좀 있다. 세미나에 가져가도 좋을 것 같고, 친구들도 잘 읽어줄 것이고. 주변에 같은 이슈에 대해 학적, 생활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건 행운이다. 여러 모로 영 나쁜 상황이 아니다. 역자후기는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감사의 말> 정도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불안하다. 미루고 있으면 영영 미루어질 것 같은 논문 일정을 한 번 더 미룰 만한 핑계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일단 미루고 나니 논문까지 중단하고 하고 있는 일이 되어버려서 더 무거워졌다.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에 잡아먹혀서 겁먹고 기운 빼지 말자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장/단기적인 목표를 가리지 않고서도, 번역가로 자리를 잡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는 게 이십대 내내 가져왔던 바람이었고, 그래서 지금 하는 일 (번역서)의 무게에 비해 이 일을 원하고 기대해 왔던 마음이 너무 커서 갖게 된 불안이라고 생각한다. 

 잘하건 못하건간에 번역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첫 책이 좀더 번역자로서의 내 기량을 보여줄 수 있을 책이었으면, 그래서 참 잘했다 소리가 나올 만한 책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도 아예 안 드는 건 아니다. 그래도 뭐 내가 잘하면 어떻게든 잘 되겠지, 하고 가급적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조용히 일을 해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