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얼음

정든 병

별__ 2011. 5. 27. 03:31

 대기실의 사람들은 얼굴에 불행을 붙이고 있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특히 많고, 어린이를 동반한 어머니는 진료실을 나오며 우는 게 관습이다. 
 택시를 타고 학교로 돌아오는데 아빠 전화가 쏟아진다. 
 강의실을 나와 전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붙이고 
 나는 약봉지를 갈기갈기 찢어 그 안에서 탄산리튬을 막 발견한 참이었다.
 그간 어디 숨어 있었냐며, 너는 마치 일기예보같다던 담당의가
 새로 지어준 약이었다. 

 엄마가 네 걱정하는게 지겹고 귀찮다며 
 아프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 말할 때 소문이란
 카드결제 문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너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으니 전화하라는 얘길 흘려들으며
 탄산리튬의 예쁜 색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엔  
 내가 가진 것들 중 온 세상에 떠벌리고 다닐 순 있어도 
 엄마 아빠만은 몰라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의사는 "재발" 이라는 말을 썼고, 나는  
 다 나은 줄 알았어요, 하고 거짓말했다. 
 다 나은 줄 알았어?
 네.

 그 동안 정말 행복했나 보다 별이가. 잘했어, 잘 지냈다니 잘했어.  

 n달만 더 지켜보자, 말할 때 그 기간은 지난번보다 세 배가 늘어 있었다.
 약에는 다시 탄산리튬이 들어간다. 
 그러니 증오도 사랑도 이제는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이건 실패일 수밖에 없다.

 대기실의 사람들은 너무 불행한 표정이라서, 나는 
 잡지를 보면서 너에게 사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물건들을 고르기로 했다.
 여기 오는 거 너무 힘들어요.
 친절한 의사는 공감의 표정을 지어주면서, 
 영점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한다. 
 
 *
 전날 낮에는 행복해서 뛰어다녔다 이런 날에는 손에서 실꾸리가 
 무시무시하게 풀려나오더라도, 젖지도 불타지도 않는 날이다. 
 그런 날마다 계단에서 떨어지거나 손이 택시 문에 끼었다. 
 언제쯤 지옥에 떨어질까 오늘 밤일까 내일일까 
 기대했는데 어젯밤이었다. 
 감정의 낙차들로 수력발전은 충분히 할 수가 있으니 
 다만 튀어오르거나 내리꽂히는 마음들이 문제다. 

 H로부터의 긴 문자, 전날 밤 나는 그의 꿈 속에서 
 "이상하게 생생한 모습으로", "나에게 집중하라고" 말했단다.
 나는 꿈 없이 유황불에 타고 있었다.
 별아 마음이 또 소금쟁이처럼 물에 떠다니니?
 아니, 홰를 치고 있어. 
 
 나는 오늘 연옥에서 살아나온 사람 같았다. "내가 이렇게 고통받는다, 
 날 위해 눈물흘려라, 너는 날 기억조차 않는구나." 한때 
 로만 카톨릭 교회는 같은 이슈로 아주 많은 돈을 벌었다. 

 *
 너는 날 너무 실망하게 하고 또 너무 기쁘게 해서
 마음이 남아나질 않겠구나 

 연옥이라고 쓸 때 그건 여자 이름같고 
 purgatory 라고 쓰면 저수지나 보호구역처럼 안전하다. 

 밤에는 친구가 
 이팝나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링거처럼 술병을 꽂고 아주 많이 마시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
 아빠의 전언은, 그러니 내 병의 경과를 자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너는 조울병이겠지, 옳은 짐작을 무심히 하면서
 너의 기관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고
 감정의 진폭은 당연한 거라고 오히려 시적이라고, 그러니
 너를 괴롭히는 건 너니까 자기 전 백팔 배, 시간내어
 며칠 절에라도 다녀오거나. 

 너무걱정하지마세요이건제문제니까
 결자해지할게요괴롭지않아요 

 엄마랑은 나중에 얘기할테니 
 
 목을 뜯어내고 싶을 때마다 그 자리에 걸린
 백금 목걸이줄을 대신 움켜쥐면서
 모든 날카로운 풍경 앞에서는
 단 이 초만 더 생각하라는
 아빠의 말을 떠올린다 너는 나를 닮았다면
 곧 이겨내겠지, 라던.

 약 먹고 두 시간이 지났다. 이제 꿈에게로 돌아갈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