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얼음

전세계

별__ 2012. 10. 15. 01:17

 <주목해야 할 다이크들>에서 요 얼마간 읽은 것 중 가장 즐거웠던 에피소드: 진저(와 그녀의 개 디거), 스패로우, 로이스가 쉐어하던 집이 팔리게 된다. 새로운 랜드로드는 그들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무례한 말을 일삼는 랜드로드에게 진저가 "이 집 내가 사고 만다!" 고 외치고, 이들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더 이상 방해받지 않기 위해 분가하려던 계획을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합심하여 집을 사기로 마음먹지만, 포닥인 진저는 대출자격이 모자라고, 로이스는 학자금 대출을 못 갚았고... (다행히 스패로우에게 저축이 있었다고) 



  지난 주에는 스프링 노트 한 권을 사러 문구점에 갔다가 진상 손님을 목격했다. 십여분 정도 그 객이 목에 핏대 세워가며 하는 말을 듣자하니 백퍼센트 본인 과실인데, 그녀는 지하층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몇 푼 안 하는 물건 그냥 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니 태도가 맘에 안 든다"고 외치고 있었다. 굉장한 꼴불견이었던 데다 무엇보다 몹시 시끄러워서, 잠깐 끼어들어 제발 좀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문구점을 나와서 그녀와 마주쳤는데, 그녀는 전화로 자기 지인에게 점원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욕을 섞어 토로하고 있었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점원은 거의 생불이었는데 말이다. 두 시간 후에 그 객은 내가 앉아 있던 카페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꺼내놓는 책을 보니 대학원생인 것 같았다.


  오늘은 낮에 애인이 내 자전거를 훔치려던 도둑의 범행현장을 포착했다. 얼굴이 작고 검은 고등학생으로, 벽돌로 내 자전거 케이블록을 부수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집 안에서 크게 다투는 중이었고, 울다가 지친 나를 위해 애인이 일단 마실 것을 사러 나가는 중이었는데, 도둑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는 도망쳤다고 했다. 어쨌든 자전거를 도둑맞지 않았다. 일요일인데도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그는 가난한 학생이 아닐까, 하고 애인이 말했는데, 나는 그애가 그런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영어실력에 비해 언어영역 점수가 떨어지는 과외소녀에게 항상 책을 읽으라고 잔소리하고, 그러면 그애는 자기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응수한다. 그애는 착하고 귀엽고 재미있는 애다. 우리는 잘 지내고, 그애는 내가 편하고 재미있다며 잘 따른다. 일 주일에 두 번 내가 방문하는 걸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것도, 과외 날짜를 바꾸면 실망하는 것도, 요즘은 내 말투를 따라하는 것도 안다. 그러나 오늘 그애의 <폭풍의 언덕> 독후감에서, 자신은 성공한 다음에 히스클리프처럼 악하고 못 배우고 없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 는 구절을 발견하고 나자 그애와 더 잘 지낼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선다. (좋게 생각하면, 아무튼 그애는 스트레잇으로 성장할 것이다, 내가 아는 레즈비언들은 자신이 히스클리프인 줄 아니까) "선생님은 왜 유학을 안 갔어요?" 물었을 때 나는 흠칫하다 "돈이 없어서," 라고 대답해 버렸다. 아이는 "헐, 불쌍" 이라고 대답했다. 그애는 내가 고등학생 때 그애랑 별로 다르지도 않은, 학교성적이 좋고, 영리하다는 평판을 받으며, 나중에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데 스스럼없는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다만 자신이 열심히 무엇을 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인 줄을 알까, 모를까.



공항철을 타고 돌아오면서 한 량을 가득 메울 정도로 전화로 떠드는 사람이 넷이나 있었다. 도회적인 불행이다. "올케, 내가 어른인데," 라는 말이 무슨 클레임의 근거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몇 번이나 외치던 여자 하나. 그 남자가 자기를 어떻게 찬양했는지 (하지만 자신은 그 남자와 '끕' 이 다른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돌아보던 여자. 모든 문장을 "오빠는,' 으로 시작하는데, 말이 끝없이 많고 목소리가 존나 크던 남자 하나. 그냥 미친새끼 하나. 그런 사람들은 나도 오늘 무빙워크 위에서 자살하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것을 알까. 이촌역 4번출구로 올라가면서 어느 순간 "나는 학위과정을 절대로 마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명제가, 지하철 스크린도어처럼 활짝 열렸다. 나는 학위과정을 절대로 마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에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그쪽으로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원하던 것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 되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의 간격이 매순간 수정되고 있다. 나는 너무 피곤하고, 일을 해도 돈이 모자라고,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고, 그리고 자주 엉엉 운다. 




나는 사람들이 전철에서 떠들지 않고 좆도 모르면서 남의 사정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세계에서 우리를 예쁜 모양으로 조용히 잘라내 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