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양
요즘은 혼자 읽는 일기를 쓰기가 아주 어렵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일기를 쓰기도 어렵다. 심리치료라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고 나는 나를 알고 안타까워 하는 사람 중 누군가가 나중에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잊어버리기 힘든 순간이 있는데 어느날 오후에 장의 집 거실에서 우리가 랍상소총을 마셨다(장은 불어식으로 발음했다) 기분이 이상했는데 겨울 오후의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우리 둘 다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순간에도 그 사실을 확신했고 장에게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가끔 그날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사과를 먹었나 귤을 먹었나 테이블보는 깅엄체크였나 아니면 좀더 복잡한 것이었나 그도 아니면 없었나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 사실 사진을 찍어놓았기 때문에 찾아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그 순간을 자꾸 나중으로 미룬다.
2년만에 한을 만나서 후문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연락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안 받으면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한이 고른 샤브샤브집은 내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장의 장례식과 발인과 안치장소 방문과 유가족과의 만남 등등이 지나고 얼마 뒤 한의 집에서였다. 한의 집에 내가 꽃을 사 간 날이 그날인지 디퓨저를 사 간 날이 그날이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은 그날의 네 사람을 위해서 라클렛을 준비해주었다. 우리가 오기 전에 예전에 모두가 함께 찍은 사진들로 영상을 만들어놓았기에 함께 보았는데 우리가 사진을 찍어두어서 참 좋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나는 사진을 참 안 찍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랬는데, 나중에 돌아와서 시간이 지나고 디가 그날 한의 집에서 영상을 본 게 정말 나빴다고 말했을 때 나도 동의했다. 너무 빨랐고 너무 성급했고 사진들이 나의 마음을 찔렀고 그 후로 아무와도 연락을 못하게 됐다. 그러나 한이 그릴을 꺼내 라클렛을 만들어 준 것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뒤로 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두려고 한다.
내가 찍은 장의 사진이 너무 없었다.
한과 샤브샤브를 먹는데 추운 계절 늦은 오후의 햇볕이 아주 포근했다. 참 이상했다. 식당은 우리밖에 없어 조용했고 일인용 인덕션 위에서 끓는 냄비에서 김이 풀풀 피어올라 얼굴을 가렸다. 왠지 우리가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도 그럴 것임을 알았다.
장은 갑자기 화를 낼 때가 있었는데 어느날 별 너무 짜증나요 그랬다. 왜요. 나랑 너무 비슷해서 짜증나요.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짜증나, 싫어, 왜 그래요? 그건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혐오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나는 아주 서운했다. 아마 울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장도 울고 있었다. 내가 장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서로 위로하려고 노력하지 않아서였던 것도 있었다.
나는 우리가 비슷한 게 그렇게 싫지가 않았다.
장도 정말 싫지는 않았겠지만 싫은 건 사실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게 정말로 싫을 때가 있었다.
나는 감정과 기억을 처리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늦은 것 같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너무 큰 단절감이 있다. 나는 단절하거나 떠나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기간이 나를 많이 두렵게 한다. 모든 일에 용기를 내야 했다. 장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세미나 단톡방에서 나오는 것, 디와 연락을 끊는 것 전부 다.
장례식이 너무너무 싫었다. 우선 장례식장 앞에 붙은 장의 옛날 사진이 싫었다. 장의 빈소에 모여있는 우리가 '기괴해 보일' 거라고 누군가 자조했는데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앞으로 느끼게 될 고립의 심정을 결코 아티큘레이트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증거가 장의 죽음인 것 같았다.
내가 따뜻하고 충만한 순간이 장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운 게 한 시간 전이었는데,
두 시간 뒤에 깨어나서 다시 나가야 한다.
요즘 나는 계속 바깥을 돌아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남는 모든 시간에 일을 한다.
만날 사람이 많은 것도 일할 것이 많은 것도 다 사실인데 우선 생각에 잠겨 있기가 싫어서다.
얼마전에 찬장정리를 하다가 구석에서 장이 소분해 주었던 랍상소총이 나왔는데 당장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중에 내가 누구를 평생 괴롭히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자잘한 것을 다 주고 나서 죽어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