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불꽃
<욕망의 불꽃> 에도 프랑켄슈타인 못잖게 강렬한 첫 장면이 있다. 1화 첫 10분. 묵직한 스트링 선율이 흐르는 중후한 취향의 거실, 모피를 입은 신은경이 외친다. "엄마 죽는 꼴 보고싶니? 할아버지 기다리셔, 어서 바이올린 켜 드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유승호는 외친다. "엄마가 내 영혼까지 빼앗아가게 둘 수 없어요." 거실 바닥에 던져진 바이올린은 산산조각난다. 신은경의 얼굴에 분노가 차오른다. "그애는... 그애는 안 돼, 그앤 니가 아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앤 창녀와 다를 바 없어!"
달려나가는 유승호. 오열하는 신은경. 그때 신은경의 전화가 울린다. 서우다.
"민재(유승호)만나기 전에 나부터 만나. 모든 걸 말해줄게."
서우를 만나러 달려나가는 신은경과, 차를 몰고 서우에게 가는 유승호 교차편집. 운전대를 붙든 유승호는 숨을 몰아쉰다. 서우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는... 나는 네게 갈 준비를 다 했는데..."
사방에 촛불을 켜 놓고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소파에 누워 있는 서우. 신은경이 나타난다. "뭘 원해. 유명한 여배우가 되고싶어? 영화 찍게 돈을 대 줄게. 민재에게만 손대지 말아줘." "정말 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줄 수 있어요? 아줌마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너! 처음부터 민재가 아니라! 내게 앙심을 품고!"
"아줌만... 내게 미안하지 않아요? ... 민재는... 우리같은 미친 사람들의 세상으로 들어와선 안 돼요. 그앤... 천사야." 고개를 푹 꺾는 서우. 신은경이 주변을 둘러보자, 열린 수면제 약병이 카메라에 잡힌다. "인기(서우)야!!! 안돼!!! 내가 모두 말해줄게!!!"
그리고 화면에 뜨는 타이틀. <욕망의 불꽃, 제 1회> 이 모든 일이 전부 첫 10분 인트로에 일어나다니, 낚여서 본 것 맞다.
욕망의 불꽃에 낚여서 낭비한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욕망의 불꽃 이야기 해야겠다. 욕망의 불꽃의 주연은 신은경. 감상포인트는 신은경의 불꽃연기. 이렇게 많은 막장요소가 있는데 짜임새와 완결성을 갖춘 대서사가 된다는 것이 놀라워서라도 열심히 보고 있다. 아직 완결이 안 났는데, 조금만 더 가면 나도 본방사수 할 수 있어. 이야기는 70년대, 방어진에서 시작된다.
- 방어진의 아주 가난한 철공소. 열 살 남짓의 두 딸을 기르는 아버지. 참한 정숙(김희정)과는 달리 나영(신은경)은 어린시절부터 신분상승에 대한 뚜렷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부유한 오랜 친구(이순재)는 막내아들 영민(자라서 조민기가 됨)을 데리고 내려와 은혜를 갚기 위해 먼 훗날 정숙과 영민을 혼인시키기로 약조한다.
- 10년 후, 20대의 나영은 신분상승을 꾀하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핑계로 버스회사 경리로 취직해 사장 아들(이세창)과 연애하고 그의 아이를 가지지만 이세창은 조폭들을 시켜 그녀를 폭행하고 버린다.
- 나영은 방어진으로 낙향해 간호사로 일하던 정숙의 도움을 받아 혜진(자라서 서우가 됨)을 낳고, 정숙은 나영을 위해 혜진이 죽었다고 거짓말하고 고아원에 맡긴다. (심지어 여기까지가 1화;)
- 10대 재벌인 대서양가 회장이 된 이순재가 조민기가 된 영민을 데리고 내려와 정숙과 결혼시키려 하지만, 정숙은 철공소에서 일하던 깡패(이름 몰라서 미안)와 몰래 좋아하는 사이다.
- 결국 나영이 바람을 넣는 바람에 깡패가 정숙을 범하고 충격으로 아버지는 사망하고 깡패는 집안 빚을 갚기 위해 사람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가고 나영이 영민과 결혼하게 된다.
- 나영은 영민과 사랑없이 결혼한 다음 미국에 가지만 미국에는 이미 영민의 애인이자 영민의 아이를 임신한 인숙이 있다.
- 나영은 인숙에게 돈을 주고 인숙의 아이를 자신이 낳은 아이처럼 키운다. 그것이 민재(자라서 유승호가 됨).
- 한편 방어진에서 정숙은 차마 혜진이 눈에 밟혀 그냥 둘 수 없었기에 고아원에서 입양해 자신과 깡패;의 아이처럼 키운다. 혜진은 나영과 흡사하게 야망의 불꽃에 타오르며 자란다(심지어 아역도 같다).
- 이 와중 깡패가 사형당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살인범임을 알게 된 혜진은 열두살 나이에 자살한다.
- 한편 미국에서 나영은 영민을, 이후에는 민재를 대서양가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민재를 위해 각종 노력을 다한다. 그러는 와중 인숙이 민재에게 접근하자 뺑소니 사고로 위장해 죽인다.
- 다시 시간이 흘러, 현재. 알고보니 혜진은 고아원에 가서 자신이 정숙의 딸이 아님을 알고 서울로 가출해 산전수전을 겪은 후 이름을 인기로 바꾸고 여배우가 된다.
- 나영네 가족도 서울로 돌아와 대서양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각종 암투를 벌이는 와중
- 인기와 민재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나영은 각종 방해를 하며,
- 그 와중 민재의 단골 커피집 아줌마는 왠지 살아있었던 인숙이고
- 이 와중 정숙은 인기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 이 와중 환경공학과 교수로 기업을 잇는 데 관심이 없었던 영민 역시 갑자기 권력의지에 눈을 뜨고 왠지 인숙이랑 바람피우고
- 그 와중 이순재는 민재를 사랑해 후계자로 삼고 싶어하고 (일명 재재커플;)
- 이 와중 영민-나영과 가장 대적하는 건 영민이 열폭하던 형 부부인 영준-애리(성현아)
- 이 와중 애리의 대학 동창이자 나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옛남자 이세창이 끼어들고
- 이 와중 영준과 정숙이 불륜관계에 접어들고
- 이 와중 나영은 인기와 민재를 갈라놓기 위해 인기의 섹스비디오;를 유출시키고
- 이 와중 민재는 심지어 영민의 친자도 아닌 것 같고
- 이 와중 이순재는 알고보니 나영(자기 며느리)네 엄마랑 바람 핀 것 같고 어쩌면 정숙과 나영 중 하나는 자기 딸일 수도 있고;;
- 이 와중 인숙은 뇌종양에;;
쓰다 보니 회의에 들기 시작한다. 나 이 드라마 왜 보는가?
막장 드라마에도 격이 있는데, 예컨대 <아내의 유혹>이 시드니 셀던류의 선정적인 복수극이라면, <욕망의 불꽃>의 욕망은 거의 순수한 상승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부자가 되려는, 나아가서 남편과 아들을 재벌 대서양가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민재를 여배우 인기에게서 지키려는 나영의 욕망은 거의 모든 사람의 욕망과 대치하지만, 여기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나름대로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다. 예컨대 이순재는 전반부 내내 전형적인 영리한 기업인이며, 이제는 늙어서 자신의 위치를 노리는 수많은 욕망들의 사정에 어두운 할아버지로 그려지고 있지만 중반부 이후 급 변신한다, 이순재는 극중 인물들과 시청자들의 인상보다 훨씬 교활한 인물로 아무래도 이 드라마의 최종보스인 것 같다. 그리고 죽었다 살아났다 다시 죽는 민재의 생모 양인숙이야말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물. 끊임없는 자극적인 사건들은 좀 심하다 싶지만 어쨌거나 개연성과 핍진성을 상당히 확보하고 있고 이는 오랜 세월 <신돈>등으로 흥행하며 시청자들의 욕망을 파악한 동시에 순문학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니 기본기도 탄탄한 44년생 정하연 작가의 역량인지도. 대사들과 심리묘사가 어쨌거나 나 보기엔 수작이다.
물론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은 서우. 서우는 신은경의 일종의 분신인데 신은경이 가진 욕망이 현실세계에서 성취 불가능할 정도의 부와 권력에 관한 의지로 출발했다면 서우는 그보다는 깊은 내면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서우의 욕망은 고독에서 기인한다: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는 게임" 에서 늘 패배한다며 울고 있는 서우, 자신이 떠나온 고향에서 자신의 죽음 같은 대사를 다시 읊는 서우에게 아무래도 마음을 겹치지 않을 수는 없고.
서우는 물론 연기를 매우 못하지만 그 못하는 점을 좋아한다. 서우의 필모그라피가 짧다 보니 <탐나는도다>, <파주>, <신데렐라 언니>등 대부분 보았는데, 그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일관적인 서투름과 갈라테아처럼 인공적으로 빚은 예쁨, 그리고 자의식적인 표정연기를 좋아한다. 이는 연극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커튼콜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가장 아쉬운 인물은 유승호가 맡은 민재. 그렇게 잘생겼는데 배역이 문제인가 어려서 그런가, 아니면 정하연 작가가 젊은이들의 사랑; 을 묘사하는 데 조금 뒤떨어지는 건가, 서우-유승호 연애하는 장면만 보면 달갑잖은 소격효과 일어난다. 느끼하고 문학적인 연애대사 무척 좋아하지만 유승호처럼 하면 좀 곤란하다. 유승호가 입만 열면 속으로 "나 죽어도 유승호랑 안사귄다" 가 절로 나오는데 나아질 가망 없고 있었어도 이미 늦었어. 유승호가 맡은 민재 캐릭터 자체가 다른 주역들에 비해 깊이가 없다. 경직된 재벌가에서 집착하는 엄마의 펫으로 살아오다 여배우와 사랑에 빠져 달아나는 청년 치고는 깊이가 없다. 몇몇 장면에서 화내는 연기가 아쉬워 보이긴 했는데, 아무튼 얼굴이 마음에 드는데 얼굴 빼고 다 마음에 안 들어서 아쉬워.
여기까지 쓰니까 이제 정말 평생 욕망의 불꽃 이야기는 안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