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얼음

습관

별__ 2010. 7. 24. 06:33

넬라 라슨의 소설 패싱(passing)에서, 나를 가장 사로잡는 부분은, 클레어의 주홍빛 "넓은 입" (마치 작약처럼 피어 있는), 그리고 그녀는 얼마나 찬란하게 죽었는지. 황금빛 붉은 화염처럼 힘차게 타오르며... 다시 걸려온 전화, 번호는 집이다. 집이네요, 눈이 와서-- 그런데 집에 있는 거면, 그렇군요. 이런 이상한 습관은 어디서 묻어온 걸까. 술을 마셨으니 커피를 마시고 집에 들어간다. 찬란의 이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때, 추운 찬란을 떠나 돌아서는 회정(심상한 기분으로), 거짓말처럼 눈이 오는 장면들 위를 지나치며, 사실 내가 상상조차 한 적 없던 눈이 태어나고, 날리는 눈가루를 맞으면서, (사실 과외 학생 어머니가 빌려준 우산을 썼지만) 이렇게 가득한 검은 태양.

찬란의 이야기를 결코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닿지 못한 수많은 다른 것들.

테이블 아래에서 너와 나의 손이 닿고 우리는 은밀해 보이려는 짧은 대화들을 위해 고개를 숙이다가, 조금 이쪽을, (정확히는 너를,) 의식하는 a를 흘끗 본다, 테이블을 지나치다 (또 심상하게) 어깨를 붙든다. 아까 나, 쟤랑 무슨 얘기 했는지 알아요? 그리고 나는 a 옆에 앉은 고운(어린) 아이를 눈짓하며, 저 아가씨 참 예쁘다네요. a는 불에 덴 듯 움츠리면서, 마치 그러지 않은 듯 행세하면서, 그래서요? 묻는다. 그래서? 이건 비밀인데, 하고 짐짓 귀 가까이로 다가가. 그런데, 당신이 더 예쁘다네요. a는 화가 난 듯, 그래서요? 다시 묻는다. 나는 웃는다. 이건 내 목숨이 걸린 비밀인데, 당신에게 누설한 건데. a는 새초롬하게 총총 걷다가 잠깐 돌아보고 고개를 숙이고, 고마워요, 그리고 다시 멀리 가고. 우산을 펼치자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우산 밑을 찾아가고, a가 다가오자 나는 우산 혼자 쓰는 사람이라며 네 쪽으로 밀어보내고. a가 지하철역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너는 네 우산을 접고 내 우산 속으로 들어온다. 눈길에 펼쳐진 우산들이 꽃 같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나는 우산을 펼쳐 들고 있다. 버스 안 오는데 춥다, 들어가지? 묻는 네게, 나는 버스 지금 와, 하고 답하고. 네 물음이 습관이듯, 내 답도 습관이고. 습관처럼 나는 우산을 들고 있고 습관처럼 너는 목도리를 풀어 내 손을 감싸고, 습관처럼 나는 웃고 습관처럼 버스에 너는 오르고,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가만히 서 있는 나도 습관이고, 유리창 너머에서 흔들리는 네 손도 습관, 버스가 떠나가면 우산을 접고 걷는 밤길도 습관이다. 눈이 오는 습관 술 마시는 습관, 눈 오는데 술 마시지 않을래요 하지만 이미 집에 도착한 거라면 춥고 발 젖는 밤에 나를 만나러 나오지는 않겠죠, 라고 말하는 대신 눈 오는데-- 하고 머뭇거리는, 고요한 습관. 습관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딘가 다른 데서 묻어 오는 거지? 확인 혹은 확신하는. 재와 나비들과 불탄 자리. comme d'habitude의 거리. 무수한 내 찬란들의 뒷모습, 우리가 가장하는 다정, 밤은 밤들 틈으로 파고들고, 나는 고양이들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잠들고, 습관, 사는 것은 만화경처럼 화사하다 우리가 눈을 대고 들여다보는 이 아찔하게 깨진 유리. 잉크 얼룩이 묻은 펜대(마치 젖은 검은 가지같은), 길을 따라 지어지는 마음의 노점들, 발자국 모양을 따라 녹는 눈, 강제 종료되는 찬란, 나는 네 삶을 찢고 싶어 무엇도 조금도 없었던 것처럼 무섭게, 끔찍한 사고를 일으키고 싶어, 찬란의 장면들이 녹아 없어질 때, 고통을 목격하는 자들 특유의 그 적요한 눈빛으로, 종이들을 검은 창밖으로 날려보내고,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회정은 습관처럼 되뇐다. 앞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정말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페이지를 되돌아가는 것은, 모두 없었던 일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번 되돌고 되돈다. 너는 집에 잘 도착하고, 나는 네가 편히 쉬기를 바라는 습관, 다시 말하면 내게는, 술 마시고 일기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습관. 나는 참 누추하다 눈 오는 밤마다.

 

+

다시 클레어의 경우. 그녀의 목에 걸린 황홀한 호박색 목걸이로, 나는 내 것을 다섯 개 혹은 일곱 개는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그녀는 찬란하다.  (2008.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