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얼음

상살이라는 단어

별__ 2010. 11. 21. 07:19

 무슨 사고처럼,
 꾸역꾸역 울던 중에 T의 전화, 앞부분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무엇과 무엇과 무엇이 해결되면) "별이랑 결혼해서 살래" 
 "안돼"
 "이 와중에서도 단번에 거절하다니 별 정말 훌륭해..."
 훌륭하지 않지만 별에게 청혼하려면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돼...  
 완급조절을 못해서 우리 전부 죽은 거야. 도로에는 요철이 있어. 


 일인칭 복수의 우리는 무수의 장면들을 
 연출하였고 트위터와 블로그에 매일 밤 두들겨 넣는 
 프로덕션 노트는 엘리야 카잔만큼 위엄있다, 다만
 우리의 배우들은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말을 듣지 않는 왼손처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면서도, 언제나 
 자길 구해주는 건 담화, 난만한 웃음과 지쳐 기어들어가 잠들
 남의 방과 남의 침대라니 비극과 살해, 살해와
 살해 사이에 끼어들어간 코믹 릴리프처럼 
 말-말-말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런 것으로라도 
 메인 플롯의 긴장을 누그러뜨려 주어야 우리는
 미치지도 않고. 아니, 비극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것이 멜로드라마를 닮았다. 희곡을 전공하며 
 배운 것이라고는 둘 사이의 치사량의 간극, 즉 
 tragedy is a genre of drama which is based on human suffering
 while emotions are always exaggerated in melodrama
 on the other hand... 

 
 그리고 내게 있는 건 패-경-옥 같은 이름들을 
 부르는 대신에 죽자고 하는 독서. 


 내일은 교회에 가야지, 그리고, 幻想手帖을 다시 읽었다. 무진의 안개는 나와 썩 어울린다, 그러나 어딘가의 무진에서 김승옥은/ 자기 이름을 걸고 조장되는 행사들에 이미 이골이 난 표정으로, 굳이 여기 있다고 말할 것도 없는 얼굴로 '잠바떼기'를 입고 있었는데.
 
 "바다? 바다에 투신한다는 건 너무나 문학적이다. 죽을 때만이라도 좀 생활인의 흉내를 내 봐."

 우리는 그가 신에게 귀의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신이 그를 구했다, 우리가 늘 겁내던 대로 
 그를 너무 많이.

 우리는 구해질까?

 내가 스물다섯살이 넘으면 아니 에르노가 될 거라고 예언한 그녀는, 죽었고, 목숨만 살아서 나와 상관없이 지낸다. 모든 것이 그러했듯 오직 절반만 옳았고, 열 아홉 살 때 이미 그녀는 내게 너의 연애는 항상 미수로 끝나는 방식으로 끝없이 반복된다고 판결했는데, 너는 너라는 미수에 대해 이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네가 예언하지 못했던 건 그 모든 것이 가진 미결성, 이라는 말을 문자창에 써넣다 닫고 다만 너의 환상수첩에 대해 생각하는데 실은 꼭 네가 아니라, 나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고. 사람들의 파국은 일생 몇 번이나 아물까. 모르겠지만, 그녀에 관하여 지금은 충분히 늦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사진 한 장 없는, 여행 일기들을 뒤적이는 밤에는 문득, 보고 싶다.
 버릴 책들 사이에서 '당신의 남편으로부터'라는 헌사를 발견했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혹시 그녀도 그런 걸 발견했을까봐 그리고 나처럼 그냥 책을 덮고 버릴 책 상자에 집어넣었을까봐,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보호하는 게 자기라니 정말 너무 못됐다. 
 나는 엄격한 사람이니 하루에 한 사람씩만 생각하기로 한다. 밤에만, 그런데 어쩌나 요즘 난 밤에만 살아 있고 꿈들은 너무 지독하다.  

 그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 센 것은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