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얼음
몰리
별__
2010. 11. 23. 10:11
<몰리 스위니>를 읽고 싶어서 없는 줄 알면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찾은, 스코틀랜드 국립극장에서 발간한 '<몰리 스위니>리소스 팩'.
언제의 프로덕션인지 모르나 수록된 무대 사진에서 보이는 셋 디자인이 무척 감명깊다. (*읽다 보니 2005년인듯)
리소스 팩에서 발췌한, 셋 디자이너 엘렌 케언스와의 인터뷰.
셋 디자인에서 접근 방식과 시작점이 궁금합니다.
셋 디자인의 시작은 우선 작가가 쓴 내용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특별한 무대 지시가 있는지를 감안해야 하는데, 예컨대 "그가 부엌문으로 들어간다", "비가 온다", 혹은 "그녀는 나치 수용소에서 새겨진 번호를 감추려고 코트를 벗는다" 같은 지시들이요. 그 다음에는 배우들의 신체 및 관객들과의 거리를 고려하기 위해 극장 무대를 스케일 모델로 제작합니다.
셋 디자인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장면별로 명세서를 만드는데, 특히 가장 중요한 건 한 인물이 다른 인물에 대해 하는 대사, 예컨대. "당신은 아름다운 붉은 머리야" 혹은 "그는 앙심을 품고 있어"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니 결국 제 손에는 스크립트의 압축 버전이 남는데 이게 '바이블'로서 디자인과 리허설 과정을 함께하게 되지요. 책과 인터넷을 참조해 극의 시대와 관련된 주제 등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또 연출자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이 극에의 접근법을 듣고 또 내가 연구한 것들과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나눕니다. 스케일 모델을 사용해 몇 가지 장면들을 같이 만들어 볼 수도 있고요. 그 다음에는 스케일 드로잉과 커스텀 드로잉을 이용해 스케일 모델을 완성한 다음에 배우들과 워크샵에 공개합니다.
<몰리 스위니> 셋 디자인에서 특별히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원작에서는 세 배우들을 위해 완전히 분리된 세 영역으로 무대가 구분되어 있고 극중 배우들은 상호소통하지 않지요. 그렉(연출자)는 배우들이 서로 소통하고 또 관객들과도 소통하도록 구상했습니다. 우리가 원한 건 관객과 배우들간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었기에 회전무대로 정했고, 또 극중에서 시간의 흐름과 기억을 오가는 데 장해물이 없길 바랐기에 아주 단순한 무대로 만들었어요. 극이 본다는 것의 문제와 인식, 환영을 다루고 있기에 일종의 거울을 사용하는 게 적절한 것 같았고 여러 가지 형태와 크기를 고려해 본 다음에 눈(目) 모양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에 거울에 비친 것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 거울 표면을 변색시켰지요. 극중에서 의사가 몰리의 눈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직접적으로 그 거울을 지시할 수도 있구요. 마지막에는 거울을 조각내어서 조각난 환상의 메타포가 되도록 했어요. 극적 효과를 위해 1막에서는 검은색, 회색과 흰색의 컬러 팔레트를 사용했고 2막의 개안 수술 이후 장면들에서는 붉은 핏빛을 사용했어요. 몰리가 시력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관객들 역시 마치 처음으로 앞을 보는 듯한 느낌이 될 수 있게.
셋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언어의 생명력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관객들이 대사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시각적 기억이 그 경험과 충격을 되살려 줄 것이라고요.
(몰리 스위니로 분한) 카라 켈리와의 대담
몰리는 사십 대 중반으로 변호사의 딸입니다. 극이 시작되는 것은 북부와 남부의 경계에 있는 카운티 도네갈의 밸리벡이라는 마을이지요.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력을 잃어서 시력이 있었던 적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에 아주 만족하며 행복해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주로 아버지의 손에서 자라서, 아버지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식물을 형태와 크기, 질감과 구성을 통해 구별하는 법을 알려준 것이 몰리의 아버지죠. 몰리의 아버지는 정원을 돌아다니며 촉각, 후각을 사용해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법을 알려주어서, 그녀가 세상에 속해 있고 완전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몰리는 박탈감이 없고 또 여러 가지 흥미도 많아요.
극의 시작에서 보이는 몰리는 자신의 남은 네 가지 감각을 사용해 삶에 잘 적응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명을 잘 알고 있으며 앞이 보이면 더 좋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아주 편안하게 지냅니다.
관객이 생각해야 할 점은, 자신의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을 건강, 즉 몰리가 즉 더 이상 행복하게 살 수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적응할 수 없는 세계로 데려갔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십 대 초반, 더 이상 두뇌에는 복원된 시력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할 공간이 없고, 그래서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해석하고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십 대나 삼십 대였다면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사십 대라면 우리가 잘 알듯이 두뇌의 기능은 약간 쇠퇴하지요. 그러니까 제 생각에 이 이야기의 재미있는 점은 이 부분인 것 같아요. 뭐, 재미있는 점들은 이외에도 많지만 이 이야기는 휴먼 스토리지요. 최적의 건강상태에 있는 한 사람을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으로 몰고 갔을 때 그들은 어떻게 대처하는지, 혹은 대처하지 못하는지?
(연출자) 그레고리 톰슨과의 대담
무엇이 당신을 <몰리 스위니> 연출로 이끌었나요?
제레미 레종 (2005년 톰슨의 <몰리 스위니>가 처음 올라간 글라스고 시민극장의 아트 디렉터)이 시민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도록 권해서 몇 가지 극을 살펴보았습니다. 제레미가 <몰리 스위니>를 추천해서 읽어 보았는데 아주 멋지더군요. 아름답기도 했고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던 데다가 프로타고니스트가 사십 대인 연극을 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당신의 연출 과정을 <몰리 스위니>와 연결지어 알려줄 수 있나요? 특히 집중하고 싶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가장 중요한 건 '극장적'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프리엘의 모놀로그 작품들은 다소 정적으로 쓰여졌어요. 인물들은 의자에 앉아 있고 대사를 할 때만 조명이 켜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식입니다. 동세가 거의 없어요. 그러니 여기서 중요했던 점은 극장적 경험을 창조하는 것, 가능한 한 생생한 장면, 움직임, 춤을 무대 위에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모놀로그에서 장면을 창조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었어요. 하지만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이 작품에는 이미 모든 이미저리가 들어가 있었기에 그걸 극장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지요, 즉 말하자면 그것들을 끌어낸 것입니다.
회전무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일단 부분적으로는 원래 '서클 스튜디오' 공간 자체가 그렇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럼 배우들은 어디에 앉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배우들이 움직일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무대를 회전시켰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더 재미있게 만들어 볼지 생각했죠.
극으로서의 <몰리 스위니>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의 접근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프리엘이 정치극에서 물러나 삶의 인간적 양상들(예컨대 관계)에 집중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읽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이 극 역시 몰리가 아일랜드 독립 전후를 표현하기에 매우 정치적인 극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연출자로서 프리엘의 다른 작품들 사이에 이 극의 위치가 어떠한지, 또 이런 식의 독법도 연출을 준비하면서 시도했는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에 이 작품은 아주 달라요. 다른 극들과 아주 다릅니다. <몰리> 전까지 전 브라이언 프리엘의 작품을 알지 못했고 <몰리 스위니> 연출 제의를 승인한 다음에야 처음으로 런던의 국립극장에서 <아리스토크랏츠>를 보았죠. 그러니 사실 이 작품이 프리엘의 다른 작품들과 가지는 관계들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어떤 극들은 연출하기 전에 반드시 연구를 해야 하고 그래야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까다로운데, 사실 관객들은 그런 사전 연구 없이 공연을 보러 옵니다. 우리는 학술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연극 작품을 연출하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극장적으로 훌륭한가 하는 점, 그리고 그렇다면 된 거예요. 우리 배우들이 아일랜드인이었으니 무언가 부정확한 점이 생기면 그가 고쳐 주었어요. 스코틀랜드에서 아일랜드 배우들과 함께 일하는 잉글랜드 사람이 된 경험도 흥미로웠죠. 하지만 <몰리 스위니>가 프리엘의 관점에 어떻게 부합하는가는 잘 모릅니다. 물론 극중 정치적인 함의가 물론 있겠지만 이는 관객이 판단하는 것이 가장 옳고, 만약 관객이 이를 알아차렸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못했더라도 이 극은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가치가 있지요.
*
여세를 몰아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97년 리뷰. 참고로 위와 동일한 프로덕션이 아니다. 아테나 극장, 연출은 카일 도넬리.
<몰리 스위니: 상실의 감각>
<마이저>, <테헤란에서의 사흘 밤>같은 코미디 연출자로서는 놀랍게도, 심각한 작품에서 카일 도넬리는 자신의 섬세한 터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 맹인 여성의 개안 수술을 다룬 브라이언 프리엘의 <몰리 스위니>의 연출은 매혹적이고, 어쩌면 작품 자체의 매혹을 뛰어넘는다. 어젯 밤 개막한 이 작품은 캐스트 또한 최고다. 몰리 역에는 장난기 많고 재기발랄한 제니 베이컨, 속물적이고 호사가인 그의 남편 역에 T. J. 에드워즈, 그리고 리처드 바우어가 알콜 중독자이며 몰리의 수술이 자신이 처박혀 있는 아일랜드 시골마을에서 빠져나갈 기회라고 생각하는 야심찬 의사인 미스터 라이스로 분한다.
제임스 F. 잉걸스의 미려한 조명과 롭 밀번의 기억에 남는 음향, 린다 부캐넌의 초현실적 셋 (바위투성이의 지형 위에 문이 떠다니는)에 힘입어 도넬리가 창조하는 것은 프리엘의 슬픈 이야기의 시적 요소들을 함축하는 일련의 이미지다. 극은 장애를 극복하는 낙관이 아니라 잘못으로 귀결되는 무감각한 선행에 관한 하나의 우화에 가깝다. 도넬리와 배우들은 작품이 함의하고 있는 상실에 집중한다. 바우어의 깊은 목소리,베이컨의 초점 없는 시설과 에드워즈의 신경질적인 동시에 죄책감을 안은 작은 동작들 모두가 이 음악적 멜랑콜리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는 라디오 드라마로도 충분했을 <몰리 스위니>의 단점을 감추지는 못한다. 세 인물은 상호작용이 거의 없다. 그들은 다만 이미 일어난 일들을 관객에게 모놀로그로 전달하며, 이 극에는 극장적 제시가 거의 없다.
드라마에 한하자면 이 극은 몰리의 수동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베이컨은 이 배역을 위트와 생동감 넘치게 소화하기에 한동안 그녀의 불행한 운명에 대한 반발은 이에 가려진다. 만약 몰리의 이야기에 인물 각자가 눈에 띄게 다른 반응을 보였더라면 스크립트는 보다 긴장을 가질 수 있었겠으나, 극에서 인물들은 모두 다르게 반응하고는 있으나 일어난 일에 대한 이해는 동일하다: 프랭크는 기사를 읽다가 어린 시절에 실명한 몰리가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몰리는 라이스와의 수술에 의무라도 되는 듯 동의한다. 그러나 몰리는 모두가 기대했던 바처럼 앞을 보는 삶에 적응하는 것들이 불가능하다.
올리버 색스의 뇌신경학 이야기들 (<어웨이크닝>,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을 읽은 독자라면 몰리와 비슷한 경우를 기억할 것이다. 버질이라는 중년 남성이 시력을 되찾으나 그 결과가 그닥 좋지 않은 이 이야기를 색스는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이라는 에세이로 썼다. 실제로 <몰리 스위니> 프로그램에는 이 이야기의 발췌본이 재수록되어 있다.
프리엘이 색스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에세이와 극은 많은 요소를 공유한다: 몰리와 버질은 동일한 시각적 손상을 입고, 같은 직업(마사지)을 갖고 있다. 프랭크가 들려주는 시각과 촉각에 대한 철학적 논박은 색스의 것이고, 시각에 대한 몰리의 첫 경험의 기반이 된 케이스 히스토리도 마찬가지다. 몰리와 마찬가지로 버질도 무척 수동적인 성품인데 사실 이러한 성품은 연극의 히로인보다는 에세이의 주인공에 걸맞다. 심지어 두 작품 모두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치료한 맹인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처럼 걸어다니는(...)" 이라는 경구를 인용하고 있다. 두 작품의 차이점은 색스의 에세이에서 이는 인간 의식의 신비에 관한, 후회를 담은 주의깊은 관찰이라면, 다정다감한 여인이 무심한 남자에 의해 희생되는 이 극은 일일드라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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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아티클의 완벽한 미국식 레토릭을 보라, "연기도, 연출도, 조명도, 아름답다, "BUT" 이 극의 치명적인 단점은 블라블라, 이 극은 소프 오페라" 으악.
연극 리뷰를 읽으며 시간과 마음을 들이는 여자는 눈을 감으면 본 적이 없는 공연들을 꼭 자신이 본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데 그 첫번째가 88년 브로드웨이 <M.나비> 프로덕션, 눈을 감으면 패왕별희 음악과 함께 화도를 따라 걸어내려오는 송릴링.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에쿠우스>도 그러하다. (미국에 체류하며 셰퍼를 연구하던 지도교수가 돌아오기 직전 연출가의 유족이 기증한 <에쿠우스>자료 수십 박스를 발견해 이 사단이 났다는 뒷이야기는 접어두고라도) 분명 그녀는 지난 겨울 동숭홀에서 <에쿠우스>를 두 번이나 봤다는데 그녀 안의 에쿠우스는 런던과 뉴욕에서 각각 한 번씩 공연되었고 때는 칠십년대로다.
꼭 쓸모없는 일은 아니다, 리뷰에는 극장 밖도 있으니. 그녀가 20세기의 모든 극장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거니와, 2차자료만이 가지는 것들 예컨대 "모든 관객들이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기실 극장에 대해 무얼 알겠는가, 몰리 스위니를 끌어안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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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나의 각색이고.
Frank:
In the very night of the operation, I was on the point of stepping into bed when suddenly, suddenly I remembered: Ethiopia is Abyssinia! Abyssinia is Ethiopia! They are the same place! Ethiopia is the new name for the old Abyssinia! For God’s sake I could write a book about Ethiopia! Absolutely the most interesting country in the world! Let me give you one fascinating fact about the name, the name Abyssinia. Abyssinia, Ethiopia…Abyssinians… Ethiopians… Abyssinia… Ethiopia, whatever, Fascinating!
수술이 있던 그날 밤, 침대로 가기 직전에 문득, 문득 기억났어. 이디오피아는 아비시니아야! 아비시니아는 이디오피아야! 그 둘은 같은 곳이라고! 이디오피아는 옛 아비시니아의 새 이름이지! 난 이디오피아에 대해서라면 책을 한 권 쓸 수도 있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나라라 단언해 마지 않아! 그 이름, 아비시니아란 이름에 대해서 끝내주는 사실 하나 알려주지. 아비시니아. 이디오피아. 아비시니안. 이디오피안. 아비시니아. 이디오피아. 왓에버. 끝내주지!
To go, or not to go, that had been the question… but of course I had to say no to him. Those rambling days were over. Molly was about to inherit a whole new world; and I had a sense, stupid, I know, but I had a sense that maybe I was, too. (pause) To see, or not to see, That’s what happened. Molly just… withdrew. It was so unfair. I thought she had nothing to loose. To forget, or not to forget, no longer she was there. And that seemed there’s nothing more I could do. (pause) To go to bed and sleep? Or not. To sleep, perchance to dream, ay, there’s the rub. For in that sleep of death what dreams may come when we have shuffled off this mortal coil, must give us pause. (pause)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어. 그러나 물론 그에게 안된다고 말해야겠지. 방황의 나날은 지나갔어. 몰리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상속받게 될 거야. 그리고 난 이런 느낌이 들어. 바보 같아, 알아. 하지만 난 이런 느낌이 들어. 어쩌면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사이) 보느냐, 마느냐, 일어난 일은 바로 그거야. 몰리는 그냥... 시들었어. 공정치 못한 일이야. 나는 그녀에게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잊느냐, 마느냐, 더 이상 그녀는 거기에 없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아. (사이) 침대로 가서 잠을 자느냐, 혹은 그러지 않느냐. 잠을 자면, 꿈을 꾸겠지. 하지만 그것이 문제다. 그 죽음의 잠에서, 우리가 이 운명의 사슬을 부수고 나면, 어떤 꿈들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머뭇거리게 할까. (머뭇거린다)
Pity to miss Abyssinia, or whatever it’s called, Ethiopia, no, Abyssinia, whatever it’s called, who cares what it’s called. Who gives a damn! Who in his right mind wants to go there, for Christ’s sake? Not you, you certainly don’t. Then why don’t you stay where you are for Christ’s sake? What are you looking for…
Abyssinia.
Molly.
Abyssinia.
The one place in the whole world I’ve dreamed of visiting, a phantom desire, a fantasy in the head, Pity to miss that.
What a bloody, bloody heartbreaking thing.
아비시니아를 놓친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 이름이 뭐든간에. 이디오피아. 아니, 아비시니아. 이름이 뭐든간에, 이름이 뭐든 누가 신경쓴단 거야.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누가 거길 가겠어. 당신은 아니야. 당신은 안 가겠지. 그럼 왜 여기 머물러 있지 않는 거지? 대체 무엇을 찾는 거야...
아비시니아.
몰리.
아비시니아.
온 세상에서, 내가 가고 싶었던 단 하나의 장소. 내 유령같은 열망, 머릿속의 환상. 그것을 놓쳐서 안타깝군.
정말 끔찍하게, 끔찍하게 마음이 아파.